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현 Mar 23. 2021

미래의 나에게 오늘을

<에디터의 글쓰기> 에필로그

마지막 글이다. 얼마 전 해체를 선언한 다프트 펑크처럼 여운과 인상을 동시에 남기는 에필로그를 쓰고 싶지만 실패했다.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틈틈이 메모한 초안을 아내에게 보여줬다.


"당신은 욕심이 너무 많아. 100 만큼 써봤자 독자는 50을 겨우 소화할걸? 그런데 지금 200을 쏟아내려고 하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진도를 빨리 뽑겠다고 교과서 수십 페이지를 넘겨봤자 다들 절반 정도 따라오잖아. 그럴 바에는 한두 페이지라도 핵심에 집중해서 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에디터의 글쓰기>에서 결국 하려는 말이 뭐야?"


아내의 평은 따꼼하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뭐라 변명할 수가 없다.


"글쓰기의 쓸모가 꽤 많다는 점. 그리고 글쓰기에도 전략이 필요하다고 알려주고 싶었어. 대부분 글을 '쓰는 행위'까지 마치고 나면 힘이 빠져 있는데 그 이후에 잘 알리는 과정도 중요하니까. 심지어 작가들도 원고를 다 쓰고 나면 출판사에 투고하거나 문학상에 적극적으로 응모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 글쓰기의 가장 큰 쓸모는 뭔데?"


가장 큰 쓸모를 고민하다가 며칠 전 계동의 한 흑백 사진관에서 사진작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여러분 앞에 있는 저와 카메라는 잠시 잊어주세요. 옆사람도 보지 마시고요. 먼 훗날의 내가 이 사진을 보며 오늘을 기억할 거예요. 카메라 너머에 있는 자신에게 오늘을 들려준다는 마음으로 렌즈를 바라봐주세요."


그 말 하나로 어수선했던 사진관의 공기가 한 번에 정돈되었다. 글쓰기의 쓸모도 잠시 잊자. 다만 20년 넘게 글을 써온 이유는 분명하다. 기억하고 싶어서. 점점 소멸하는 기억을 붙들고 싶어서. 이 순간 쓰는 글이 5년, 10년 또는 더 먼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가 쓴 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태어날 적이나 서른이 될 무렵 아버지께서 쓰신 편지를 보면 잠시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다. 심지어 플랜트 엔지니어 출신인 장인어른은 해외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필사한 기술 매뉴얼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덕분인지 40년 전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들려주시곤 한다. 더욱이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삶의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걸 목격하면서 글쓰기의 쓸모에 대한 생각은 확고해졌다. 기억을 저장하는 금고가 있다면, 글로 남은 기록은 열쇠 역할을 한다. (후략)


아버지의 편지(위)와 장인어른의 기술 매뉴얼 필사본 ©손현


에필로그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폴인 멤버십 전용)




<에디터의 글쓰기> 연재를 마쳤습니다. 2020년 12월 30일 첫 연재 시작 전, 미리 쌓아둔 원고가 있었지만 그 여유가 오래 가진 않은 걸로 기억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생방송급으로 배수진을 치며 주말마다 7천~1만 자 분량의 원고를 써야 했으니까요.


'글쓰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부담스럽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제 업에 대한 생각을 현재 기준으로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인 동시에 잘해야 본전인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도전하길 잘했다고 느낍니다. 테니스 교본을 써야 하는 테니스 선수의 마음으로 라켓 그립은 제대로 쥐고 있는지, 스윙 폼이 엉성하진 않은지 돌이켜보는 기회가 되었어요.


글쓰기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무궁무진합니다. 관련 도서가 출판시장에 꾸준히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제 원고도 폴인에 연재한 내용을 토대로 보충을 거쳐, 종이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아마도 (제목을 바꿔) 여름 즈음에 출간될 듯싶은데요. 책 소식은 그즈음 또 전하겠습니다. 집필하는 동안 글쓰기 관련 신간을 일부러 멀리하기도 했습니다. 혹여나 그걸 참고할까 봐 두렵기도 했고요. 이제는 저도 독자로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미 멋진 책들이 너무 많더군요.


"근데 10화 소재 정해짐? 걱정 돼서"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도헌정 에디터님도 이제 한시름 놓으시길 :)


모처럼 이번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어 후련합니다. 그리고 같이 일해보고 싶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기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이자 디자이너인 양수현에게 특히 감사를 표합니다. 배우자가 도전하고 싶을 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출산이 임박한 와중에, 남편이 글 쓴답시고 주말마다 모니터만 쳐다보느라 본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서운했을 텐데 제 글의 초안을 보며 따꼼한 평도 해주고, 방향을 잃을 때마다 제대로 잡아주는 양치기 역할도 했습니다.


그동안 <에디터의 글쓰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읽다가 ‘앗 그게 뭔데 그러지’, 싶은 분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1화부터 읽어주셔도 됩니다.



End Credits

#에디터의글쓰기

- 편집: 도헌정, 공다솜

- 인터뷰이: 고수리, 이승희

- 홍보 및 유통 총괄: 김종원

- 제안 및 독려: 임미진, 정선언

- 특별 감사: 양수현, 김은경 & 폴인 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