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란 식물에게 주는 물과 같다
테니스는 홀로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성이 큰 스포츠이긴 하지만 반대편 코트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의사결정을 혼자 해야 한다는 점,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도 온전히 내 몫이라는 점에서 테니스를 더 매력적으로 느꼈다.
<챌린저스>에서 타시는 패트릭에게 “테니스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영화 전반에 걸쳐 성적 은유를 가득 넣어 스타일리시하게 들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헷갈렸다. 이 영화는 정말 ‘테니스’ 영화가 맞나? 아니면 테니스를 소재로 세 남녀의 삼각 ‘관계’를 다룬 청춘 영화인가? (글 후반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세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네트 위를 오가는 공처럼 빠르게 튄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있고 제멋대로 사는 패트릭, 타시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은퇴를 고민 중인 아트, 그리고 오로지 테니스(에서 이기는 데)만 관심 있는 타시. 패트릭과 아트는 한때 타시의 사랑을 두고 경쟁한 적이 있다. 아니, 그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랑의 작대기가 엇갈리든 말든, 셋의 게임은 지체 없이 진행된다. 테니스에서도 시간을 너무 끌면 경고를 받고 포인트를 잃는다.
“테니스는 관계”라는 표현을 처음에는 로맨스나 성적 욕망으로만 해석했다. 욕망과 야망을 동시에 갖춘 영화감독이자 스스로를 ‘통제광’이라 부른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이니, 장면 하나하나의 의도를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주제를 곱씹어보니 경기에 임하는 당사자와 관중의 관계, 또는 당사자 내면에서 팽팽히 맞서는 두 자아의 관계로 확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티모시 갤웨이는 <테니스 이너 게임>을 통해 ‘게임을 이겨야 한다’, ‘공을 잘 쳐야 한다’고 압박하는 명령자이자 나의 외적 의식을 자아 1, 그걸 실행하는 신체이자 내적 무의식을 자아 2로 가리키며, 우리 모두에게는 자아 1과 2가 있다고 적었다. 이걸 <챌린저스>에 적용하면 관계의 긴장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아트가 펼치는 이너 게임이 유독 측은했다. 아트는 부상으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이 어려워진 타시에게 자신의 코치가 되어달라고 한다. 타시와 결혼해 둘 사이에 딸도 있다. 곁에 있는 타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알아”뿐이다. 타시가 아트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건 승리다. 코트에 서 있는 건 아트 혼자이고, 의사결정도 혼자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이 모든 게 관중석에 앉아있는 타시의 기대를 충족하고 인정받기 위한 관계 속에 작동하는 거라면?
엔딩 크레디트는 US 오픈 뉴 로셸 투어의 결승전이 끝날 무렵 올라간다. 오랜만에 결승에서 맞붙은 아트와 패트릭은 매치포인트를 지나 타이브레이크까지 간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때 감독은 이야기를 맺는다. 물론 라스트신을 보고 동호인으로서 결국 누가 이긴 건지, 공이 라켓에 닿는 순간 어느 코트에 있던 건지, 둘 다 네트를 건드린 건 아닌지 등 미끼를 물고 싶지만…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감독이 남긴 단서가 하나 있다면 러닝 타임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트가 슬쩍 미소를 내비쳤다는 점.
테니스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다큐 <브레이크 포인트> 시즌 2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노박 조코비치와의 경기를 앞둔 아들에게 엄마이자 매니저인 아네케 루네는 이렇게 말한다.
“노박은 뭘 잘하지? 노박은 포인트를 따려고 하지 않아. 라파도 그렇지. 노박은 자기 자신이 포인트야. 포인트를 따려고 경기하는 선수가 있고 자기 자신이 포인트인 선수도 있어. 라파와 노박이 물 흐르듯이 말이야(In flow). 너도 포인트야. 통제도 포인트도 너 자신이라고.”
— 아네케 루네
아들에 대한 엄마의 기대는 유효했다. ATP 싱글 랭킹 8위 홀게르 루네는 2023년 5월,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 오픈 8강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상대로 2세트를 먼저 따내며 이겼다.
기대란 식물에게 주는 물과 같다. 적당한 수준의 기대는 생장을 촉진하지만, 과하면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독하다. 기대를 충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기대는 늘 현실보다 더 높은 방향으로 조정된다. 스포츠뿐 아니라 주식시장, 직장, 가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타인의 기대, 세속적 욕망이나 야망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며 즐거움을 얻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영화의 라스트씬이 더 인상적인 까닭은 그 즐거움이 비록 찰나에 불과한 꿈일지라도, 욕망을 정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코트에서는 그 판타지를 좇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