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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Sep 02. 2020

한국어 선생님 일기 04

04 슬럼프에 다이빙하기

물론 일을 하며 웃음 짓는 소소한 이벤트도 많았다. 나름 섬세한 성격이라 작은 것에 굉장히 잘 감동하는 편인데 이런 성격에 정 많은 베트남 학생들이 정말 많은 힘이 되곤 했다. 숙제를 확인할 때 학생이 노트 한 귀퉁이에 써 둔 ‘생선님♥’ 혹은 ‘성샌님♥’에 남은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기도 했고, 베트남 과자라며 준 두리안 과자를 먹는 내 표정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웃는 학생들 덕에 나까지 즐거워진 날도 있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한국어 글짓기 대회를 열었다. 거기에서 우리반 학생이 '한국에서 만난 좋은 사람'을 주제로 글을 썼는데, 놀랍게도 그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다음은 학생이 쓴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제목 : “한국에서 만난 좋은 사람”

안녕하세요! 저는 아잉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국에 온 지 7월 됩니다. 한국 나라는 아름답고 사람이 많고 아주 칠전합니다. 저는 한국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제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 주셔서 재미있습니다. 제 서생님은 외모가 키가 크고 머리가 길습니다. 정말 예쁩니다. 제 선생님은 성격이 외모보다 더 좋습니다.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따뜻한 사람이고 활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항상 재미있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서툰 한국어로 적어낸 진심을 느꼈던 그때 어찌나 감동을 받았는지, 더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겠다고 다짐했었다. '재미있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비록 갤럭시워치가 얼마인지를 밤 10시에 카카오톡으로 물어 본다거나 집주인 독촉 전화를 대신 받아 달라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를 당황시키는 학생들이었지만 사랑스러운 부분도 분명 있었다. 학생들은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게 참 고마웠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일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현실은 늘 그렇듯, 나의 계획과 생각을 그냥 고분고분 따라오지 않았다. 기껏 복사해 온 학습 자료를 눈앞에서 내팽개친다거나, 수업을 시작하면 책을 쌓고 그걸 베개 삼아 편안하게 엎드려 자거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등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 몇몇의 학생 때문에 경력도 없는 주제에 타성에 젖은 매일을 억지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수업 도중에 전화를 받으러 나가야 한다고 해서 허락을 하고 계속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 학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들어와서 대뜸 나에게 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대신 받아달라는 의미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나는 수업 도중에 잠깐 전화를 바꿔 받고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이 번호 주인의 한국어 선생님인데 학생 대신 받았습니다. 지금 수업 중이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오는 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택배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 당시 학생이 본인의 주소를 잘 몰라서 택배로 물건을 주문할 때마다 건물 이름까지는 쓰고 호수를 안 써서 매번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화를 내더니 나에게 한다는 말이 "그런 거 하나 안 가르치고 뭐 하는 거예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영화 베테랑의 남자 주인공에 제대로 빙의를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 날 일은 아직도 조금 억울하다. 눈물까지 꾹 올라올 정도였다. 수업이 다 끝나고 그 학생을 불러 한국 주소 제대로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어쨌든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면 해야지 싶었다.


그 사건은 가뜩이나 일의 의미와 보람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나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안겼고, 결국 당시의 나는 완전히 의욕을 잃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기운을 내뿜어도 모자랄 신입이 동태처럼 있으니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어학연수 비자 조건이 까다로워지며 신입생 수가 대폭 줄자 나를 포함한 파리 목숨의 신입 강사들이 짐을 싸게 되었다. 첫 학교에서의 두 학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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