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장식 또는 장치로서 기록!(2)

- 프리즘 스크립트로 본 옆나라의 실록들-

by PRISM SCRIPT

이어서 조선과 이웃 국가들의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사료들에 프리즘을 대고 관찰해봅니다.


조선: “금고에 넣고 자물쇠로 잠근 타임캡슐 또는 정권견제 장치로서 기록”


<조선왕조실록> 이미지출처/우리문화신문


조선왕조실록은 왕권견제의 목적도 있었는지라 왕 앞에서도 기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자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했지만, 사관은 그 말까지 그대로 남겼습니다. 기록의 독립성이 실제로 작동한 상징적 장면입니다. 그 외에도


- 세종은 태종실록을 보고 싶어 했지만, 황희의 “열람이 관행이 되면 기록이 왜곡된다”는 만류를 받아들여 포기했습니다. “왕도 못 본다”는 원칙이 제도화된 사례입니다.


- 임진왜란기 판단 실패가 그대로 박제됩니다.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을 둘러싼 오판과 공방, 원균 징계 논의같은 전황 혼선이 생생히 남습니다. 당대 교정력은 약했지만, 후대가 실패 과정을 복원하는 ‘타임캡슐’ 구실은 했습니다.


- 병자호란의 굴욕과 내분도 낱낱이 기록됩니다.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과 조정 분열은 실록·관문서로 정리되어, 이후 정책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었습니다.


- 정조는 “실록은 보기 어렵다”며 선왕들의 말·행동을 뽑아 《국조보감》을 대폭 편찬했습니다. 왕이 곁에 두고 보는 ‘교훈집’이었지만, 그때그때 필요에 따른 선별·순화로 생생한 실패담은 흐려지기 쉬웠습니다.



그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옆나라들의 기록들은?



중국: “용비어천가스러운, 권력자 찬양과 정권 선전을 위한 기록”


《명실록(明實錄, Emperor of the Ming Dynasty record)》 - 이미지 출처/인문데이터연구센터


이에 비해 중국의 황제는 자신과 선대의 기록을 당대에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실록 편찬과 정리가 재위 중에도 진행되었고, 황제의 의중이 반영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헤겔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세계정신(World Spirit)”의 가장 초기·유아적 단계 국가였던 중국(및 아시아 왕조국가들) 의 실록은, 황제가 발행한 자신의 치세와 치적을 위한 선전물이었습니다 장점은 분명했습니다. 실록의 콘텐츠를 학습할 수 있었기에 정책의 연속성과 행정의 신속한 학습이 가능했고, 외교·군사에서 전례 탐색이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효용은 곧 한계를 낳았습니다. 권력이 개입하는 기록은 미화와 삭제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후대 사가의 눈에는 정권 홍보물로 비칠 수 있고, 정권 교체와 함께 서술의 톤이 바뀌며 사실의 골격이 흔들렸습니다. 요컨대 중국의 실록은 실시간 CCTV처럼 곧바로 참고할 수 있었지만, 편집실에서 필터가 씌워진 화면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도 중국은 국가(공산당)가 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할 뿐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생성되는 모든 기록을 검열하고 통제합니다.


- 명 실록은 ‘사후 편찬’이 원칙이었지만, 정치가 개입했습니다. 명 실록은 각 황제 사후 다양한 원천을 모아 만들었고, 건문제(2대)는 폐위로 ‘공식 실록’이 아예 빠졌으며, 영락제가 앞선 연대기를 재배열했습니다. 권력 교체가 기록의 뼈대를 흔든 대표적 사례입니다.


- 황제가 과거 실록 수정 사업을 명했을 정도로 개입 여지가 컸던 청나라 건륭제를 보면, 초기 청나라 역사를 기록한 실록, 특히 "만문노당"을 전면적으로 개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는 건륭제가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고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됩니다습니다. 기록이 ‘정권 홍보물’로 기울 수 있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 궁정 연대기 ‘동화록(東華錄)’ 등은 재위 중 활용된 참고집이었습니다. 청대 학자 장량기(蔣良騏)의 《동화록》은 궁정사료를 토대로 엮은 연대기로, 후속 보완본까지 나왔습니다. 당대 정책 참고용으로 쓰였지만, 역시 정권 논리에 영향받기 쉬웠습니다.



일본: “문학과 사료를 오락가락 하는 기록”

絵本太閤記(7編84冊)이미지출처/ホームメイト


일본의 상황은 또 달랐습니다. 근대 이전 국가 차원의 연속된 공식 실록이 거의 없었고, 무가·사찰·귀족·상인의 기록이 지역과 주체별로 흩어져 축적되었습니다.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치며 가문 문서, 전투기, 일기, 사찰 기록이 다종다양하게 남았고,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시각이 병렬로 공존했습니다. 이 다양성은 장점입니다. 중앙 검열의 일괄 통제가 약한 만큼 날것의 진술이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라는 시험을 통과해서 국가의 관료가 된 사관들이 제작한 중국과 조선의 공식문서기록인 실록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하고 공백과 편향 또한 심했습니다. 문학서사나 다름 없을 정도로 가문의 명예와 이해관계가 서술을 비틀고, 전국적 전체상을 얻으려면 여러 조각을 맞추는 힘든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메이지 이후 국가가 근대식 편찬을 시도했지만, 이미 과거의 기록들은 제각각 모자이크처럼 흩어져 버린 뒤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조선에 비해 대중들이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버전과 장르도 다양한데 이미지 과잉시대를 살아가는 현생인류가 봐도 번쩍뜨일만큼 수준높은 일러스트(삽화)가 들어가 있는 것들도 많다는 것! (괜히 세계최대 애니강국이 아님. 위의 이미지는 1797년에 출판된 <에본태합기>인데 장르가 무려 실록소설!!!! *참고로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고 저 위의 삽화는 당시 전문적으로 활동한 일러스트레이터 岡田玉山의 작품)


-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기록’ 《신초코키(信長公記)》. 가신 오타 규이치가 메모·일기를 바탕으로 엮어 현장성이 뛰어나지만, 한 가문의 시각이 짙습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기 《태공기(太閤記)》. 에도 초 오제 호안이 쓴 평전으로, 유통·개작이 잦아 ‘사실과 문학’의 경계가 흔들립니다. 따라서 당대 인기와 함께 편향 위험도 커졌습니다.


- 다케다 가문의 병법·전장 기록 《고요군칸(甲陽軍鑑)》. 전투 기술·지휘 체계가 상세하지만, 특정 번(藩)의 무공 과시 성격이 강합니다.


- 에도 막부의 공식 연대기 《도쿠가와 짓키(德川實紀)》의 수치 불일치.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사자 수 등에서 다른 자료와 큰 편차가 납니다. 전국적 ‘단일 진상서’가 부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프리즘을 대고 조선과 중국의 실록을 들여다 본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두 가지 길 중 하나가 선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처럼 당대 통치 효율을 위해 활짝 열어두고 왜곡의 위험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조선처럼 후대의 진실을 위해 꼭꼭 닫아두고 활용성을 포기하느냐 입니다. 여기에 비해 일본은 동시대 실록을 제작한 양국과는 달리 국가가 공인한 실록자체가 없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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