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팅'은 컨셉이 아닙니다

'문구(Copy)'만 있고 컨셉이 없는, '망한 기획' 사례

by 불꽃지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추진된 ‘가야국역사루트 재현과 연계자원 개발사업’ 제안서 사례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대가야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재조명하고,

고령 대가야 문화관광자원의 핵심 거점으로 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있었다.


전시 기획의 로직을 설명하는 제안서 내용을 페이지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 3

4 5 6

7 8 9

image033.png
image044.png


이 제안서를 읽고 난 후 어떤 전시가 만들어질지 선명하게 그려지는가?


전달하려는 전시 내용이 9페이지에 헤드카피 형태로 나열되어 있을 뿐, 기획의 줄기와 전개 방향은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인상적인 카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기획의 뼈대 없이 언어만 쌓인 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방식의 제안서는 얼핏 독창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기획의 골격은 전달되지 않는다.

실제 기획에 앞서 '강한 표현어' 두드러진다. 언어의 매력에 함몰되어 컨셉을 잊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많은 기획자들이 한 번쯤 빠지는 흔한 실패 패턴이다.




이 제안서는 기획 로직이 힘이 없다. 그 결과, 방향성을 나타내는 개념어가 9가지나 나열되었지만 주제로 수렴하는 논리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비전이고, 무엇이 전략이며, 주제가 어떻게 함의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채, 위계 없는 카피라이팅 속에서 기획은 끝나버린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이 주제를 디자인으로 이끌어갈 ‘컨셉의 부재’가 치명적이다.


구체적으로 제안서의 9개 문구를 살펴보자.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개념어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다.

‘한류로드의 중심, 대가야’는 전시의 주제로 쓰였으면서 동시에 홍보용 슬로건처럼 반복된다.

‘고령관광루트’나 ‘고령, 대가야국의 중심에 서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기획의도나 핵심가치와 같은 로직은 빠져 있고 왜 중심에 서는지 근거가 없다.

‘못 다한 이야기, 대가야’, ‘고령인의 실제 거주촌’은 사실 사례 분석이나 실행 아이디어인데도 전략 언어처럼 제시되어 있다.

또 ‘1500년 전 대가야, 그 화려한 귀환’, ‘대가야 도읍지, 21세기 한류 대가야촌으로 되살아난다’는 내러티브에 가까운 문구지만, 주제·카피와 한 자리에 혼재되어 있다.


이렇듯 기획 로직은 사라지고, 전체는 문구 나열에 그쳐버린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무엇이 주제이고, 무엇이 전략이며, 무엇이 단순 카피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다. 메시지는 흩어지고, 기획의 줄기는 흐려진다.



기획에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하는 것은

화려한 카피가 아니라 ‘로직(Logic), 구조’이다.


주제, 기획의도, 핵심가치, 전략, 관점 같은 방향 언어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위에 메시지와 내러티브가 얹히고 나서야, 카피라이팅이 힘을 갖는다. 반대로 이 순서를 거꾸로 하면, 멋진 문구는 남지만 기획은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한류로드의 중심, 대가야’라는 한 줄이 주제가 되려면, 그 아래에 기획의도와 핵심가치가 분명히 놓이고, 전략과 스토리텔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이 제안서는 역설적으로, 카피라이팅 이전에 먼저 세워져야 할 것이 기획의 로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매 페이지마다 반복되는 개념어가 모두 ‘방향 언어’에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한류로드의 중심, 대가야’, ‘고령관광루트’, ‘고령, 대가야국의 중심에 서다’, ‘1500년 전 대가야, 그 화려한 귀환’ 같은 문구들은 모두 “대가야를 어떻게 부각할 것인가”라는 선언적 주제에 그치고, 인과관계가 빠져 있다. 그러나 기획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일이다. 설득은 논리의 연결에서 나온다. “~~ 해서 ~~ 한다”라는 인과관계 속에서 어떤 이슈가 존재하고, 그로부터 어떤 차별점과 메시지가 도출되며, 그것이 어떻게 스토리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제안서에는 그 모든 연결이 비어 있었다.


기획 언어는 원래 다섯 갈래로 나뉘어 서로 맞물려야 한다.

방향이 맥락을 낳고, 맥락은 전략을 만들며, 전략이 메시지로 드러나고, 메시지는 스토리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번 제안서에는 방향 언어만 있고, 나머지는 공백으로 남았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컨셉의 부재’다. 컨셉은 단순히 주제나 슬로건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컨셉은 다섯 갈래 언어를 하나의 줄기로 묶는 중심축이며, 프로젝트 전체를 호흡 있게 만드는 로직의 허브다. 그러나 이 제안서에는 컨셉을 찾아볼 수 없다. 카피라이팅은 남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모아주는 기획적 관점은 빠져 있다.


이 상태에서 전시 콘텐츠를 구성하고 공간 디자인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시각적으로 구상되는 컨셉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획이 애매하면 후속 공정—콘텐츠, 공간 디자인, 운영 전략—모두가 흔들리며 어려움에 직면한다.


따라서 기획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하고 가장 잘해야 하는 것은 화려한 카피가 아니라 기획 로직이다.

방향 언어가 자리를 잡고, 맥락과 전략이 뒤를 잇고, 메시지와 스토리가 따라붙을 때, 마지막으로 카피라이팅이 힘을 갖는다. 이 순서를 지킬 때 비로소 기획은 설득력을 얻는다. 결국 기획자는 개념어들을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각 층위마다 로직을 세워 나갈 때 설득력 있는 제안서를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카피, 눈길을 끄는 워딩은 AI가 끝도 없이 쏟아낸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기획자가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은 ‘지금 쓰는 이 단어가 어느 갈래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기획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별하는 힘이다. 이 구분이 곧 기획 논리를 세우는 출발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개념어'를 정리하는 다섯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