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키는 손이 점점 느려진다.
넷플릭스 〈흑백 요리사〉를 틀어놓고 거실 바닥에 산처럼 쌓인 빨래 더미를 접긴 했는데, 도저히 일어나서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힘이 나지 않는다. 그냥 이 위에 쓰러져 자버리고 싶다.
시계를 슬쩍 보니, 어김없이 저녁 여덟 시.
지금 내가 졸리다고?
말도 안 되는 시간이다, 저녁 8시라니.
나는 원래 밤도깨비다. 남들 졸릴 시간에 정신이 또렷해지고, 집중력이 오르고, 뇌가 “쇼타임!”을 외치던 인생이었다. 그런데 하와이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확히 여덟 시면 하품이 폭격처럼 쏟아진다.
하와이와 한국의 시차는 -19시간.
19를 더했다 뺐다 계산하기 귀찮아서, 그냥 “한국 시간 +5, 하루 빼기”라는 나만의 공식으로 외워두었다. 그러니까 한국의 저녁 8시는 하와이의 자정이다. 하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각.
덕분에 나는 평생 못 할 줄 알았던 미라클 모닝을, 실수로 시작해버렸다.
버티다 못해 열 시쯤 잠들면, 어김없이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번쩍 떠진다. 그것도 알람 없이, 정신이 고카페인처럼 선명한 상태로. 왜냐하면 새벽 다섯 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열 시니까.
나는 분명 새벽에 일어났는데, 몸은 “늦잠 실컷 잔 사람”처럼 가볍다.
꿀이다, 정말.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기쁨, 미라클 모닝.
하와이 만세.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보니 하루의 시작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곧 일곱 시가 되면 배가 고파진다. 예전에는 아침을 거의 거르던 사람인데, 여행 이후로는 “뭐라도 꼭” 먹게 되었다. 한국 시간 오전 7시는, 하와이로 치면 딱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김치찌개에 파 송송 썰어 넣고 계란말이까지 부쳐 아침을 먹고도 시간이 남는다. 남편과 함께 여행지에서 사 온 드립백 커피를 내려 마시는 여유까지 누린다.
하와이 물가가 너무 비싸서,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외식 한 번 못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비싼 여행이 내 일상에 ‘새벽 다섯 시의 선물’을 남기고 간 셈이다.
세 식구가 식당에 가서 밥 한 끼 먹으려면 20만 원은 훌쩍 넘어갔다.
거기에 아직도 적응 안 되는 팁 문화까지.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주문을 받고, 컵의 물이 1cm만 줄어도 쏜살같이 달려와 채워주고, 필요 한 건 없는지 살뜰히 물어봐 주는 서빙을 처음엔 “와, 미국 사람들은 다 이렇게 친절하구나”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수증 아래쪽에 적힌 금액을 보는 순간, 그건 ‘친절’이 아니라 ‘서비스+팁 패키지’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받은 친절만큼 지불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맛이란.
달콤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지갑에는 꽤 쓰디썼다.
특가 항공권에 홀랑 넘어가 시작한 여행이라,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호텔은 그림의 떡이었고, 부엌이 딸린 에어비앤비를 골라 대부분의 식사는 우리가 직접 해 먹었다. 가끔 푸드트럭에서 포장해온 음식으로 잔칫상을 차리는 정도.
한국에서는 반찬 앱 켜고 버튼 몇 번 누르면 30분 안에 현관 앞에 도착하는 시대에, 미국 와서 이렇게 장보고, 썰고, 볶고, 치우고 있으려니 “내가 뭔 고생을 하는 거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와이 거지들이 부럽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비박을 해도 얼어 죽을 걱정 없는 1년 내내 따뜻한 기후,
끈적거리지 않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공기,
아침마다 눈 뜨면 “오늘은 어디서 누워 있을까”만 고민하면 될 것 같은 날씨.
장 보러 마트에 가도, 카트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곳이 태평양 오션뷰다.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포장해 나와 가까운 해변 공원 벤치에 앉아 먹으면, 전혀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최고급 레스토랑 뷰가 부럽지 않은 자리. 바닷속까지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물결이 파도에 부서지며 눈앞에서 반짝이고, 멀찍이 산호초 위로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는다.
왜 하와이 새들은 또 그렇게 예쁜지.
노란 부리가 인상적인 새들이, 마치 레스토랑 서버처럼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서성인다. 밥을 먹다가 ‘어글리 코리안’이 되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도 밥알 팁을 조금씩 나눠줬다. 그러면 그들은 과장 하나 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기쁘다는 듯 친구들을 몰고 와 또박또박 쪼아 먹는다.
밥 한 스푼, 파도 한 스푼, 새들의 서빙 한 스푼.
그렇게 완벽한 한 끼가 완성된다.
몰로키니라는, 마우이 섬에서 가까운 초승달 모양의 스노클링 포인트가 있다.
그곳에서 스노클링 투어를 하던 날, 우리는 바다거북과 함께 수영을 하고, 멀리 혹등고래의 등지느러미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완전히 행복에 취해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다가, 문득 뭔가 이상한 서늘함을 느꼈다.
가슴께를 내려다보니, 래시가드 안에 입은 비키니 끈이 끊어져 있었다.
개방적인 미국이라지만, 이건 아니잖아.
나는 한껏 구부정해진 자세로 가슴을 감싸 쥔 채, 몰로키니 투어가 끝나자마자 Ross로 달려갔다.
Ross는 백화점에서 안 팔리는 물건들이 모여드는 아웃렛이자, 그마저도 안 팔리면 마지막으로 흘러 들어오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보기 좋게 정리된 매대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매의 눈으로 ‘득템’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다.
그 날 나는, ‘급하게 사 입을 수 있는 비키니’를 찾아 헤매는 아시아 엄마 한 명이었다.
다행히도 몸을 가릴 수 있는 친구 하나를 건져 입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끊어진 비키니 끈처럼, 나의 직장 생활도 예고 없이 끝이 났다. 당황해서 가슴을 가린 채 허둥지둥 달려간 곳에서 나는 대충 몸을 가릴 옷을 찾아 입었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었다. 옷은 대충 구하면 되고, 중요한 건 여전히 내 눈앞에 고래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자연 속에서 머릿속을 텅 비우고 돌아오니, 다시 채울 힘이 생겼다.
예산이 우리를 절약하게 만들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더 자주 바다에 앉아 있었고, 더 많이 걸었고, 더 느리게 숨을 쉬고 왔다.
여행 내내 아이는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엄마, 하와이에는 PC방이 없나 봐요?”
그 질문이 너무 웃겨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PC방이 필요 없으니까 없지 않을까?”
컴퓨터 화면 속에서 물고기 잡는 게임을 하는 것보다,
진짜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
비교 불가다.
현실 세계가 눈부시고, 여유롭고, 몸으로 할 것이 많을 때
가상 세계의 매력은 조금씩 힘을 잃는다.
하와이에는 그만큼 “현실 쪽이 더 재밌는” 장면들이 널려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에서 돌아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뜰 때면 아직도 몸의 일부는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창밖은 칙칙한 겨울 하늘인데, 내 안에서는 여전히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쯤 되면, 하와이 거지가 다시 부럽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혀 다를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행자의 눈으로 본 그들은
바다와 바람과 햇살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거지”였다.
그리고 나는, 여덟 시만 되면 졸려지는 시차 덕분에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한국에서 하와이를 조금씩 다시 살아낸다.
김치찌개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아직 자는 가족을 한 번 더 보며.
하와이의 진짜 선물은, 비싼 기념품도, 예쁜 사진도 아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현실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