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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 41,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41.

- 오 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아카스텔라까지(22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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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인데 산꼭대기 마을 오 세브레이로는 어둠과 안갯속에 숨죽인 듯 조용했다.

'산티아고 159km '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안갯속의 성당을 등지고 오늘 숙소인 트리아 카스티야를 항해 걷는다. 어제 길은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이고, 오늘은 숲 속 등선을 내려왔다가 포이오 언덕을 다시 오르락내리락한다.

어둠 속 숲 속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핸드폰 불빛으로 길만 보고 걷다 순례길 이정표를 놓친 것 같아 많이 당황했다. 다시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야 하나 제자리에 멈추어 한참을 있으니 뒤에서 랜턴을 켠 순례자들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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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은 우리에게 괜찮냐며 묻는다. 친구가 이럴 때 혼자가 아니고 둘이어서 힘이 된다고 말한다. 걸으며 혼자여서 좋았던 시간들과 혼자가 아니어서 힘이 되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나이가 드니 점점 혼자 있는 시간들이 자유스러워서 편안하고 집중할 수 있어 소중해진다.


갈리시아를 지나는 카미노에서 가장 높은 해발 1,335m의 포이오 정상을 지나면 트리아 카스티야까지는 22km이다.

어둠 속에 성 로케 언덕의 순례자 조각상을 보았다. 조각가 아쿠냐가 만든 바람을 뚫고 걸어가는 거대한 순례자의 동상이 저 멀리 산등성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무척 고독해 보였다.


'이 높은 고지대 순례길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눌러쓰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오후에 내린다는 비가 날이 밝자 내리기 시작한다. 산을 에워싼 운무가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항상 구름과 안개는 많은 생각을 가져온다. 갈리시아 지방 날씨는 아주 변덕스럽다고 하더니 한 달 걸어온 레온 지방보다 확실히 심한 것 같다. 날씨나 지형 등 자연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삶이 달라진다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특성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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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잠시 멈추자 비 먹은 초록빛 넓은 초원에 소들이 움직이는지 워낭소리가 은은하게 풍경소리처럼 들린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드넓은 초원의 소들과 염소들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농가들, 오래된 성당, 샘물이 흐르는 작은 마을 여러 곳을 지난다. 지명도 어렵고 별 특징이 없다. 마을 입구부터 축사 냄새에 진입로의 반은 소똥이나 개똥이니 잘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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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르는 길은 짧으나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비도 피할 겸 카페에 들어갔더니 빌바오에서 돌아오는 버스에 함께 탔던 한국 아저씨 세분을 만났다. 그분들도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이곳저곳 들려 구경한다고 한다. 70이 넘어서 친구 세 사람이 가고 싶은 대로 여행하다니 수수한 외모와 달리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고원지대를 통과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된다. 우리나라 강원도 운탄고도 길과 비슷하다. 가파른 내리막을 걷는데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늘은 왼쪽의 내리막길을 선택했다. 오르비오산의 편안한 풍경과 트리아카스테야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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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순례길을 걸으며 버섯응 캐는 이탈리아 청년

비가 많이 오는데 젊은 순례자가 길가에 무수히 자란 버섯을 따고 있다. 아이 얼굴만큼 자란 버섯들이 무리를 지어 나무 밑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관심 있게 쳐다보자 영어를 못하는 그는 먹는 버섯과 먹지 못하는 버섯을 구별하는 방법을 무언극처럼 설명했다.


'버섯에 소금만 뿌려 볶아 먹으면 참 맛있겠네!'


오비도에도 마을을 통과하여 칼데이론 산의 중턱의 목축지 사이를 지나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비가 오다, 바람이 불다, 해가 반짝 나며 옥빛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도 있다.


사람도

하루에

저렇게 변덕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오르비오 산의 능선은 사진에서 보던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목장이다. 멀리 예쁜 마을 트리아카스테야가 가까이 내려다보이지만 구글 앱은 7km 남았다고 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라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걸리는 시간은 굉장히 다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금방인 듯하지만 하루가 길 때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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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비가 와서 쉬지도 못하고 산길을 빨리빨리 걸었다. 12시가 넘자 따뜻한 볕이 너무 반가워 가방에 가득 있는 어제 삶은 밤을 먹기로 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숲 돌담길 이끼 위에 우비를 깔고 앉았다. 양말을 벗고 밤을 먹고 있으니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쳐다보며 인사를 한다. 밤을 먹으라고 주었더니 손을 흔들며 크리스마스 때 난로에 구워 먹는 거라며 싫다고 한다.


'저들은 한국 사람들이 못 먹는 것이 없다는 걸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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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 백 년이 더 된 나무들

물이 흘러 진흙길이 된 내리막 숲길에 소똥과 굴러 다니는 밤송이들때문에 조심조심 걷다 보니 어느 사이 트리아 카스티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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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

중세에는 번성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순례자들이 지나며 머무는 마을인 것 같다. 거리에 현지인은 영혼 없이 담배만 피워대는 노인 몇 명만 보이고 순례자들만 넘쳐난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사립인데 10유로의 행복이다. 신축 건물에 넓고 싱글 침대이다. 어제의 보상이다.


"삶은 대체로 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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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식당

순례자들이 많이 있는 식당에 갔더니 한글 메뉴가 있다. 14유로 순례자 정식에 소갈비가 있다. 스페인 와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먹는다.

'와우,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를 먹다니 운이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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