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53,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53

올베이로아에서 무시아까지(32.7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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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걷는 나

아침 일찍 서둘러 무시아까지 먼 길을 나선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후 제일 많이 걷는 32km이다. 이 구간은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의미와 자연 속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코스로 단순한 걷기를 넘어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길로 알려져 있다.


7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가득하다. 핸드폰 카메라로 담기지 않을 만큼 별들이 가득하더니 한순간 먹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전등을 밝히며 산길을 걷는데 걸음이 빠른 남자 외국인들이 스쳐 지나간다.

걸음이 빠른 사람들과 같이 걸으니 내 걸음도 같이 빨라져서 산길을 두 시간에 10km를 걸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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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로 가운데 노란 화살표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갈림길을 만났다. 피스테라는 왼쪽, 무시아는 오른쪽 화살표를 따라 걸어야 한다. 함께 오던 사람들이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각자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산등성이 풍력 발전기가 신이 나서 윙윙 소리 내며 돌아간다. 비 오기 전에 빨리 걸으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갈리시아 농촌 풍경이 제주도 돌담길과 곶자왈을 걷는 것 같고 월정사 선재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물살이 빠른 계곡을 지나면 인적이 드문 마을이 나온다. 예쁘게 만든 화살표 조형물도 지나고 오래되어 문을 닫은 작은 성당과 화사한 수국 담장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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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아로 가는 길은 바다로 향하는 길이라 내리막이 많았다. 지칠 때쯤 멀리 확 트인 바다가 보였다. 대서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육지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내가 있었다. 생장에서 걸어서 걸어서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을 가로질러 땅끝까지 왔다는데 온건히 벅차올랐다.

어제 같은 알바르게에서 잤던 슬로베니아 아가씨가 혼자 걸어오다 기쁨의 소리를 지른다.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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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은 거친 바람으로 파도에 일렁이며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듯했다.

그래도 비가 아직 안 와서 천만다행이다. 바다가 보여도 이정표에는 8km가 남았단다.


' 바다가 바로 아래인데 두 시간을 더 걸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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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산티아고 순례길 무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The Way가 생각난다. 순례 첫날 피레네산맥에서 사고를 당한 아들의 유해를 껴안고 먼 길을 대신 걸은 아버지. 아버지가 한 달 동안 함께했던 아들의 유해를 무시아 해안에서 뿌려주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이혼한 아버지와 혼자 자란 아들, 행복하지 않았던 부자의 비극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죽은 아들이 인도해 준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는다.

2002년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한 상징조각 '상처'

주인공이 서 있던 자리 옆으로 야고보와 성모 마리아의 인연을 기리는 비르셰교회가 서 있고, 하얀 등대, 그리고 언덕 위에는 2002년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한 상징조각과 0km 표지석이 있다.


무시아의 상징 페리다는 창조주가 거대한 손으로 바위를 위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 찢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알베르토 바뉴엘로스의 작품 '상처'라는 뜻의 이 작품은 2002년 11월 13일 오일탱크가 무시아 해변에서 부서져 약 66,000 톤의 기름이 쏟아져 나와 오염된 바다의 상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높이는 11m, 무게는 400톤에 달한다고 한다.


세상의 끝이라고 유럽인들이 믿었던 무시아와 피스테라까지 걸은 후 순례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 또한 이 여행에서 돌아가면 그처럼 이전보다 좀 더 여유로운 모습일 것이다. 무시아의 상징 페리다는 창조주가 거대한 손으로 바위를 위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 찢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오늘 무시아는 바람이 엄청 심했다. 대서양의 사나운 바람은 거대한 조형물 페리다와 0km의 이정표, 성당만 남겨두고 모든 것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거친 파도는 바닷가의 커다란 돌들을 부숴버릴 듯 부딪히고 있다.

파도와 바람에 놀란 사람들이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작고 수수한 성당은 문을 활짝 열고 따뜻한 불빛으로 사람들을 맞았다. 제단 뒤 깊은 곳까지 모두 공개하는 성당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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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장에서 880km 걸어온 나는 오랫동안 기대하던 옥빛의 아름다운 무시아 바다가 아닌 성난 대서양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방파제에 앉아 순례길에서처럼 이 바람에서도 나를 지켜 줄 분신 같은 배낭과 신발을 꼭 껴안았다.


완주스탬프를 받고 증서를 받았다. 돌돌 말아 산티아고 순례 완주증 통에 넣었다. 담당자가 완주증서를 건네주면서 지금 비가 많이 오니 내일 피스테라 갈 때의 주의사항에 대해 알려준다.


이곳 무시아에서 스탬프만 받고 피스테라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시아와 피스테라 중간지점에 위치한 바르에서 스탬프를 받거나 지정위치의 해변에서 사진을 찍어 확인받아야만 피스테라에서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끄덕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있자 이내 파도가 잦아들었다.


생장에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다시 서쪽으로 걸었다.


' 0km, 더 이상 땅은 걸을 곳이 없다.'


내일은 동서남북 중 이제 남은 북쪽 해안 길을 따라 또 다른 0km 피스테라까지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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