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듣기 쓰기
언제부턴가 글이 길면 피곤했다. 종이책은 무거웠고, 고민하긴 더 귀찮았다. ‘읽기’를 잊은 그대가 읽어주길 바라는, 그럼에도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3줄 요약’이라는 말이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것인데, 긴 게시글을 3줄로 축약해주는 문화다. 자매품으로 ‘좋은 글이군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가 있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영어권에도 ‘tl;dr’이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too long; didn't read’를 축약한 것으로, 직역하자면 ‘너무 길어서 읽지 않았다’가 되겠다. 그냥 웃어 넘기기엔 어쩐지 뒷맛이 쓰다.
초 단위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디지털 시대. 이제 너무 긴 글은 그 자체로 ‘민폐’인 것일까? 카드뉴스가 메인을 차지하고, 비주얼로 소통하는 인스타그램이 가장 핫한 마케팅 수단이 됐다. TV마저 ‘본방사수’를 하기보단 원하는 순간만 짜깁기한 하이라이트 영상이 대세. 오늘도 사람들은 댓글 전쟁을 벌인다. ‘난독이세요?’
우리의 독해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지난 7월 방영된 SBS스페셜 ‘난독시대’는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꼬집었다. 2007년부터 살펴본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 1등급 점수(100점 만점)가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특히 유례없이 어려웠다던 작년 수능의 경우 역대 최저치인 84점을 기록했다.
난이도를 탓하기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데이터가 심상치 않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는 전 세계 만 15세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테스트다. 이순영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2006년 읽기 영역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읽기 능력의 국가 순위가 지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며 “특히 ‘하’ 수준 아이들이 전체 32.9%에 이른다. 3명 중 1명은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거나 교과 학습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라 설명했다.
읽기는 우리 인류의 두뇌에
완전히 새로운 회로를 더했지요.
‘문해력(文解力)’은 오로지
호모사피엔스만이 가진
가장 중요한 후천적 성취 중 하나입니다.
-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中
독해력이 떨어지는 것이 비단 학생뿐일까?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독서량은 성인 8.3권, 학생 28.6권으로 집계됐다. 교과서와 학습참고서, 잡지, 만화 등을 제외한 통계이니, 성인보다 학생의 독서량이 월등히 많다.
재미있는 것은 초·중·고등학생의 독서량 차이다. 초등학생의 연간 독서량은 67.1권이나 되지만, 중학생은 18.5권, 고등학생은 8.8권이다. 대학 입시에 가까워질수록 독서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논술학원에는 새벽부터 줄을 서면서, 글쓰기의 출발점인 독서는 등한시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한 가지 위안을 주자면, 인간이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는 그의 저서 <다시, 책으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읽기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읽기’는 6000년 전쯤에야 나타난 비자연적인 문화적 발명입니다. 그러나 읽기는 우리 인류의 두뇌에 완전히 새로운 회로를 더했지요. ‘문해력(文解力)’은 오로지 호모사피엔스만이 가진 가장 중요한 후천적 성취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읽기를 습득하기까지 기나긴 발달 과정은 그 회로의 연결 구조를 깊고 탁월하게 바꿔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읽는지에 따라 생각하는 방법도 변한다. 그런데 이 문해력은 앞서 말했듯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읽기에 필요한 신경회로를 발달시킬 유전적 프로그램이 없다는 뜻이다. 독서가 습관이듯, 읽기도 반복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읽는 뇌’ 회로의 형성과 발달에 가장 절대적인 환경은? 당연히 부모다.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천천히 글을 읽을 때, 부모와 아이는 서로에게 주의를 최대로 집중한 상태다. 아이의 뇌는 무척 바쁘다. 읽기에 대한 긴밀한 유대를 쌓고, 엄마 아빠와 상호작용하며 애착을 형성하고, 단어와 문장과 개념을 학습하고, 엄마 아빠가 바라보는 것에 오랫동안 집중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진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공동 관심(joint attention)’이다. 책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것은 뇌신경에 최선의 다중감각적 ·언어적 연결을 구축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미국소아과학회(AAP)는 자녀에게 책을 주기적으로 읽어줄 것을 적극 권장한다. 영유아기 때부터 ‘이야기 시간’을 만들고 6~7세까지 이를 계속하면 아이의 두뇌 계발에 유익하기 때문. 아이와 함께 책을 읽을수록 육아가 수월해진다는 연구도 있다. 럿거스대학 연구팀이 미국 20개 도시에서 어머니와 자녀 2165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3세 사이에 책을 읽어준 횟수가 많을수록 ‘엄격한 육아’를 할 가능성이 작았다.
일주일에 4회 이상 책을 읽어준 부모일수록 아이에게 소리치기, 위협하기, 체벌 등 신체적인 행위와 정신적인 공격행위를 덜 했으며, 아이의 분열성 행동을 쉽게 컨트롤했고, 육아 스트레스도 낮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책을 읽어준 부모일수록 아이와 더 친했다.
럿거스대학 연구팀은 어릴 때 독서를 활발히 한 아이일수록 교육 수준이 높아 경제적 안정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성인의 평균 소득 수준이 30~42% 더 낮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연구팀의 지메네즈 교수는 “전자책을 읽어준 부모와 자녀의 상호 작용이 더 낮게 나타났다”며 “전통적인 종이책을 반드시 우선하라”라고 덧붙였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줄거리를 이야기하며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대신, 전자책은 버튼을 누르고 기기에 신경 쓰느라 핵심을 놓친다는 것이다.
다독가로 소문났던 한 지인은 몇 년 전부터 종이책을 사지 않는다. 전자책만 고집하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성이었다. 종이책 대비 전자책이 저렴하고, 나무를 베고 인쇄를 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편리함이었다. 물리적·시간적 제약 없이, 출장이나 여행지에서도 얼마든지 원하는 책을 스마트폰 하나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내용을 검색해서 몇 초 만에 해당 페이지를 찾아낼 수도 있다.
온라인 도서 플랫폼 ‘밀리의 서재’ 서영택 대표는 인터뷰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은 서로 보완재”라며 “전자책이 활성화돼야 종이책도 살아난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밀리의 서재는 국내 최대 월정액 독서 앱으로 회원의 77%가 2030 세대다. 최근에는 기획부터 제작, 서비스까지 오리지널로 만드는 ‘밀리 오리지널’을 출시, 종이책으로 출판한 바 있다.
이미 책을 사랑하는, 오랜 시간 공들여 책을 읽어본 이에게는 ‘전자책 VS 종이책’ 논란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는 즐거움’을 아직 모르는 어린 독자들은 다르다. 3세 미만 유아에게는 디지털 기기보다 책의 물리적·시간적 존재감을 먼저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기반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2015년 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5세의 어린이가 하루 평균 4시간씩 디지털 기기를 사용했다. 2년 전 52%였던 0~8세 어린이의 디지털 기기 접근율은 75%로 상승했고, 성인은 1년 만에 117%로 크게 늘었다.
스크린을 보다 원래 하던 일을 까맣게 잊어본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기의 지속적인 자극은 이렇듯 끊임없는 주의 분산을 낳는다. 마치 메뚜기처럼 한 곳에 있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현상. 신경과학자 대니얼 레비틴은 이처럼 주의가 금세 다른 일로 옮겨가는 것을 ‘새것 편향’이라는 진화적 반사작용으로 해석했다. “멀티태스킹을 하다 보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중독의 구멍으로 빠져든다.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고 지속적인 노력과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보상을 얻고 싶어 하는 전전두엽 피질에는 해롭다.”
디지털 기기의 자극에 노출된 아이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에 익숙해진 뇌가 다음 단계의 자극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은 널리 알려진 대로 싸움, 도피, 스트레스와 관련된 호르몬이다. 끊임없이 주의가 분산되고, 외부에서 자극이 밀려들지만, 지식의 저장고에 통합되진 않는다.
결국 아이들의 뇌는 독자적인 지식의 기반을 구축하거나 독립적인 사고와 상상력을 키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읽기’를 통해 비유와 추론을 끌어내는 능력이 더디게 발달한다는 뜻이다. 또한 공감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스크린을 통해 접속해 있는 만큼 타인과 상호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UCLA의 발달심리학자 퍼트리샤 그린필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매체에는 장단점이 있다. 어느 매체나 어떤 인지적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것을 희생시킨다. 인터넷은 인상적인 시각적 지능을 발달시키는 대신 심층 처리(DEEP PROCESSING) 과정을 희생시킬 것처럼 보인다. 심층 처리란 주의 깊은 지식 습득, 귀납적인 분석, 비판적 사고, 상상과 반추 같은 것이다.”
구구절절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3줄 요약을 하자면 결국 이거다. 우리가 예전보다 깊이 읽지 않는다는 것, 독서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함께 종이책으로 시작할 것, 독서에 익숙해지고 난 뒤에야 디지털미디어와의 시너지를 노려볼 것. 호모사피엔스의 특권을 무시하기엔 우리의 지난 6000년이 너무 찬란하니까.
WORD 이현화
PHOTO 문덕관
COOPERATION <다시, 책으로>, SBS스페셜 ‘난독시대’,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