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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pr 01. 2018

아름다움과 외로움의 문제

부활절 전야 미사를 보는 2시간 내내 많은 생각을 했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치 내 자신이 부활한 느낌이랄까... 미사에 참여했던 다른 분들도 그랬을까... 사실 나는 2시간동안 말씀보다 내 자신의 사유에 더 집중했다. 무언가 성스러운 순간을 스스로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 생각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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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시작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었다. 대칭과 비례, 숭고와 감동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내 삼강 오륜으로 넘어갔다. 나는 보편과 특수라는 측면에서 군신의 의로운 관계가 숭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로 치면 '과일(보편)'과 '사과(특수)'의 관계처럼 신하는 군주에게 종속된다. 어쩌면 부자의 친함도 그런 숭고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부부와 붕우, 장유의 관계는 대칭과 비례의 관계, 즉 사랑과 우정의 관계란 생각이다. 요즘말로 치면 공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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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주제도 종잡을 수 없었다. 고독과 외로움, 생각과 실천(경험) 그리고 판단, 앎과 삶, 이념과 신념, 타자와 타인 그리고 신자, 인간과 자연, 본질과 현상, 국가(민족)과 종교 그리고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개념들이 아름다움의 대칭과 비례, 숭고의 문제와 연관지어졌다. 물론 사랑과 우정, 의리의 문제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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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끝나갈즈음 생각도 정리되었다. 나는 부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 모두가 감사했다. 더불어 잠자던 아이가 깼다. 애엥~ 하고 우는 소리가 마치 부활성가처럼 들렸가. 다행이 성체를 마친터라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나왔다. 프란체스코성당에서 주는 맛난 국수를 한그릇 먹고 정신적 육체적 포만감에 가득찬 채로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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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너무 복잡해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디. 그 단면만 하나 소개하면, 인간은 눈을 감으면 고독에 빠진다. 나와 나의 둘의 관계는 늘 완벽하다. 눈을 뜨면 둘은 하나가 되어 타인과 대면한다. 타인이 내 고독을 공감하지 않으면 난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동일성의 문제가 떠오른다. 불가능한 동일성은 늘 난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외롭지 않을수 있을까... 있다. 그것이 바로 이념의 문제다. 이념이 동일하면 차이가 있어도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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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인간이 만든 사상이요 규범이다. 우리는 이를 타자라 혹은 객관이라 부른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터라 아무리 머리를 맡대고 다듬어도 불완전하다. 그래서 희생이 따른다. 지난 200년 동안 우리는 그 희생양이었다. 그런데 이념의 최대 난점은 아무리 많은 희생과 제물을 바쳐도 그 불완전함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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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불완전한 이념을 보완할 방법이 없을까... 그것이 바로 신념, 즉 종교다. 종교가 이념을 보완하면 불완전함은 한층 보완되어 희생도 줄일수 있다. 더불어 고독도 외로움이 아닌 기쁨이 될수 있다. 타자의 이념 혹은 타인과의 생각 차이도 존중될수 있다. 우리는 모두 타인과 타자를 초월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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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년 동안 이념이 신념을 대체하겠다며 의기양양 등장했다가 실패했다. 무교제국 소련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의 아버지 몽골제국이 그랬듯이. 종교를 탄압한 나치이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시 종교적 영성이 도래하고 있다. 서방의 교황과 동방의 대주교, 티벳의 달라이라마와 이슬람의 쿠란이 전면에 나선다. 신념은 자본에 의해 문제가된 외로움을 달랬다. 상품으로 인한 외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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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이란 결국 대칭과 비례의 아름다움이다. 이를 대체한 아름다움이 숭고다. 그것은 비례와 대칭같은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닌, 양심과 의리의 도덕적 아름다움이다. 놀라운 점은 그 숭고가 대칭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신과 등거리에 있는 대칭,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평등할수 있는 대칭말이다. 신적 관점에서 대칭은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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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은 숭고로 부활하여 윤회를 지속한다. 때문에 인간에게 비례와 대칭, 숭고는 모두 중요하다. 인간은 본래 대칭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이 고독함이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부활하기 위해선 신념 즉 종교가 필요하다. 이념만으론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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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유독 맑스가 원망스럽다. 신념으로 가득찬 노동자를 이념으로 이끈 그가 원망스럽다. 물론 그는 좋은 뜻이었겠지만... 아렌트가 그랬듯 언제나 근본엔 선이 있다. 악은 과정에서 들어날 뿐이다. 그런점에서 나는 신념으로 가득찼던 맑스의 근본이 아닌 이념화된 맑시즘의 과정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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