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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Mar 30. 2018

공공예술, 공공디자인

예술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으로 예술은 지배층의 선전과 선동, 즉 지배수단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술의 역할, 지배층을 비판하고 사회를 진보시키는 현대적 예술과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예술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선전인가 비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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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 다를 뿐 둘다 맞다. 19-20세기의 거대한 정치적 변동을 떠올릴때, 예술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체제와 문화를 비판하는 역할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은 '역사의 종말'을 조롱하지만 나는 이를 '정치의 종말'로 읽는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가 왔기에 역사=정치는 종말을 고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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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더니 급기야 국가까지 장악했다. 아니 본래 현대 국가는 자본이다. 국가는 국민이 세금으로 공동구매한 금융 상품이다. 지배층은 이념의 보자기로 덮어 그 사실을 감추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시장으로의 권력 이동을 까발리자 노골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 예술도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비판이 아닌 선전과 선동의 수단으로서 스스로를 변모시켜야 한다. 자본의 지배수단은 상품이다. 그러니 예술도 작품이 아닌 상품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토지)도 그렇게 되었는데 예술이라고 못될게 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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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확 바뀔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자존심을 세워줄 중간지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요 국가다. 현대에서 사회와 국가는 자본의 다른이름이다. 일종의 세례명같은. 성스러운 그 이름들은 비판적 예술을 공공적으로 요청한다. 나는 이런 상황이 '공공예술'과 '공공디자인'이라는 기묘한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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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정치적 한계에 다다르자 기술적, 이상적 재현에 골몰한다. 이런 접근은 공공의 요구에 호응한다.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때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공공예술과 공공디자인을 생각하면 늘 씁쓸함을 느낀다. 예술 윤리가 자본 윤리처럼 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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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상품화된 공공예술과 공공디자인을 써놓고 괜히 씁쓸하다. 출구전략, 그러나까 상품화를 빠져나올 방도가 마땅치 않게 때문이다. 한가지 방도는 분명 있는데... 그건 왠지 과거로의 회귀 같아 마뜩치 않다. 다른 한가지가 더 있는데 이것은 별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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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종교고 후자는 과학이다. 따지고보면 과학도 일종의 종교다. 그렇다면 아... 결국 예술은 다시 종교의 품으로 부활, 귀의, 환생 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이 회심이 싫다면 예술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오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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