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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ug 06. 2018

귀여움에 대하여

귀엽고 미소한 것들의 존재론 (1) – 불편한 아름다움

작은 것은 대체로 귀엽지만, 모든 작은 것이 귀여운 것은 아니다. 왜일까? 귀여움이란 대체로 제 기능을 배반하는 아름다움의 일종으로, 우아함과 상치된다. 우아함에는 어떤 필연성과 첨예한 위태로움이 동시에 부과되어 있다. 김연아의 우아한 몸짓은 손과 발의 바로 그 궤적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우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몸짓에는 한 치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스며 있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공존한다. 만약 김연아의 몸짓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첨예한 위태로움은 곧 그저 불편한 마음으로 전화되었을 것이다. 우아함은 “가장 인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그래서 철두철미 경제적인 아름다움이다. 스시 장인 지로가 초밥을 쥐는 간결함이 우아하듯, 제 목적에 한없이 충실한 전투기의 곡선은 잘 들여다보면 무척 우아하다. 역으로 너무 날카롭게 벼려진 나머지 제 기능을 초과한 일본도는 장인이 얼마나 기예를 밀어붙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일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우아하지는 않다. 우아함, 그것은 어떤 목적에의 충실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롯이 기능에 충실한 것, 즉 모종의 내적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작더라도 그다지 귀엽지 않다. (혹은 우리가 그 기능을 잠시 망각할 때만 귀여울 수 있다: 적혈구나 오버로드가 귀여울 수 있는 상황.) 우리가 귀엽다고 수식하는 것들은 굳이 우열을 가려본다면 거의 열등한 쪽에 할당될 것이다. 뒤뚱거리느라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펭귄, 계단을 오르는 데 애를 먹는 웰시코기, 허우대 멀쩡한 청년의 “허당끼” 등등. 귀여운 것은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비경제적인 “부족함”의 아름다움, 기능에 충실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출시 당시에는 엄청난 혁신이었던 아이폰 3gs는 왜 지금 보면 귀여울까? 3.5인치인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스마트폰에 기대하는 온갖 기능에 미치지 못할 만큼 작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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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글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반갑다. 아름다움을 그저 느낌만으로 향유하기 보다는 이렇게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이런 단어들을 깊게 사유하는 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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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아함과 귀여움의 차이를 비율 혹은 비례관계로 본다. 우리가 이상적이다 생각하는 비율과 비례에 가까우면 우아하고, 이상적인 비율과 비례에서 멀어지면 귀여움을 발산한다. 귀여움은 비율이 생기기 전 초기값이거나 비율이 흐트러지는 마지막이다. 어린아이들은 머리가 크고 몸이 작아 귀엽다. 귀여움은 이기고 싶다는 우열관계를 배제하고 포용과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그래서 귀여운 그림을 보면 모든 경쟁심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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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아함과 귀여움을 우열승패의 관계가 아닌 서로 다른 인식관계로 본다. 인간의 몸이 귀여움에서 시작해서 우아함을 거쳐 다시 귀여움(?)으로 재귀하듯 인간의 인식도 변화한다. 호문쿨루스가 상징하듯 인간의 뇌인식도 귀여움 편향이다. 그래서 인간의 개념적 인식은 이미 비례가 깨진 귀여운 상태에서 비롯된다. 배움이 거듭되면 표상이 확대되면서 우아함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뭔가를 처음 아는 사람은 귀엽게 우긴다. 그런데 늙어서까지 편향을 우기면 전혀 귀엽지 않다. 그냥 추해진다. 즉 귀여움이 늘 선호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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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애니메이션에서 고양이가 귀여운 표정을 지을때처럼. 이때도 비율이 깨질수록 귀여움은 더해간다. 물론 적정선은 있다. 아무튼 우아함과 귀여움의 인식도 자신이 생각하는 비율과 비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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