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러 생각

말과 윤리의 근본 구조

by 윤여경

1.

"우주에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차는 생각할 필요도 엄따"

-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오는 대사다. 아직 개봉안된 영화가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는데 극중 찬실이(강말금)는 연하남을 짝사랑하는데 나이차이 때문에 고민하다가 이 대사를 날린다. 나는 이 대사를 듣고 피식 웃으며 '인간의 나이차'가 아니라 '우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

코로나19로 주말 내내 집에 있었다. 하루종일 아이에게 시달리다가 저녁즈음 최봉영 샘이 전화를 주시면 문을 걸어잠그고 선생님과 통화했다. 나와 아이의 나이차는 40, 선생님과 나의 나이차도 20이 훌쩍넘는다.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도합 60의 나이차를 넘나들며 대화한 것이다. 그러나 대화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와는 공룡과 로봇 사이의 치열한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선생님과는 우주의 작은 미물인 사람과 바이러스, 근본적인 윤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
선생님은 산책 내내, "사람은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 "사람 윤리의 근본은 무엇인가?" 등을 고민하셨다고 한다. 역시나 대단한 통찰을 얻으셨고, 이를 들려 주셨다. 먼저 '앎'의 문제를 잠깐 요약하면, 앎은 '느낌자질'에서 온다.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다섯가지 감각에 의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립자든 별이든 모두 어떤 느낌을 지각했기에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존재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만약 우리집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게 되면 나는 귀신과 더불어 살아갈 방도를 찾게 될 것이다. 즉 사람은 함께 있는 존재를 느끼는 순간,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그 존재와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는다. 요즘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듯이.
-
그런데 물리학에서 우리는 우주물질의 약 4%만 알고 있다고 말한다. 약 96%는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른다. 사실 이 수치도 많이 의심스럽지만, 1%만 상황이 달라져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사실상 사람은 우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
그럼 느낌자질이 확실한 존재에 대해선 알까? 사람이 그렇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 사람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모르고 있는 존재다. 수년을 같이 일하고, 수십년을 같이 살아도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장담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마음은 순간 바뀔수 있고, 요즘은 몸도 그렇다. 최근 빌 브라이슨의 <몸>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비록 지난 두세기동안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지만 역시나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구나.." 이렇듯 사람과 더불어 수백만년을 산 사람조차 사람의 몸과 마음을 모르니 과연 어떤 존재가 사람에 대해 알겠는가. 사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조차 믿기 어렵다. 어쩌면 열길 물속을 안다는 것도 오만이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크던 작던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우주와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는 이런 상황을 전제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상황이란 바로 '모른다'는 상황이다. 그 '모름'을 인정할때 작게 나마 '앎'으로 한발짝 내딛을 수 있다. 사실 수천년전 이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인지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윤리'의 기초를 세웠다.


2.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맥락을 살피면 "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라"이다. 이 문구는 고대그리스 국가들의 신들이 모인 델피신전 입구에 써있었다. 사람들은 신탁을 올리기 위해 델피신전을 들리면서 그 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불멸의 신들이 모인 신전에 써 있는 문구를 "네 자신이 죽은다는 것을 알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재치넘치는 소크라테스는 그 권위있는 문구를 살짝 비틀어 인용한 것이다.

-

최봉영 샘은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윤리 개념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그리스 신들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 같다. 물론 그 안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적 기준에 비할바가 못된다. 가령 코로나 사태를 그리스신에게 맡겼다면 이미 수천만명, 수억명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은 잔인하고 잔혹하다. 그래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한 투키디데스는 신들을 원망하며 "전쟁은 잔혹한 교사다"라고 썼을 것이다.
-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했던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런 신들의 잔혹함을 간파하고 있었던듯 싶다. 플라톤의 <국가>편에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유명한 '정의' 논쟁이 나온다. 학자들은 소크라테스 편을 들지만 그 대목을 읽으며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말을 무시하고 교묘한 말빨과 논리로 우긴다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저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좋아요' '사랑해요'를 남발하면서도 뒤로는 트라시마코스를 신뢰했던듯 싶다.
-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의 정의를 주장했다. 즉 "다 필요없고 힘센놈이 짱이야"라는 정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정하긴 어렵다. 잔혹한 교사인 전쟁을 치른 분들, 아니 전쟁에 관련한 역사책 한두권만 읽어도 모두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강자가 무조건 이기는 세상을 인정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건 동물의 세상과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동물의 세상에도 기본적이 도리가 있다. 배고픔을 채우면 더이상 욕심부리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의 욕망과 같은 미래의지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배부름에 만족한다. 그래서 경제학에서 말하는 '낙수효과'가 가능하다. 어쩌면 그리스신들의 세계도 그랬을 것이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 전쟁'(일리아스=일리온전쟁)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약탈한 뒤에 집으로 돌아간다.
-
전쟁영웅 소크라테스는 전쟁에서 무언가 느꼈을지 모른다. 갈등을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아닌 대화로서 풀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대부분의 갈등은 '분배'의 문제였으니 갈등을 최소화하는 아니 갈등 자체가 없는 이상적인 분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본적인 것들에 매달린다. 그가 매달린 것은 바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을 통해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통찰이 이른다. 이 '모름'이 바로 갈등을 최소화하고 분배를 이상적으로 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제시했고, 그들의 목적은 일정부분 달성되었다. 강자의 윤리기준은 말과 논리로 바뀌었고, 알렉산더와 로마 같은 강자과 강대국들도 이 윤리기준을 일정부분 수용했다. 그렇게 모두를 포용하는 법과 윤리체계가 만들어졌다.


3.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요한복음의 첫문장이다. 나는 이 로고스=말씀이 무슨 말인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로고스의 의미를 묻곤 했는데, 누군가는 논리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철학이라고 말했다. 물론 로고스에는 논리와 철학의 의미도 담겨 있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찝찝했다. 그런데 이젠 알듯싶다. 요한이 말한 이 말씀이 바로 사람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윤리'라는 점을.

-

최봉영 샘께 윤리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이 말씀이 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리스신화에는 윤리가 없다고 하셨다. 나는 구석기 동굴 벽화와 고대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조각을 근거로 당시 지중해의 윤리는 동물적인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들의 동물적인 것에서 윤리의 엑기스를 뽑아 신화를 구성했을 것이고, 이 신화는 강자의 윤리에서 말씀=법으로 굴절되어 로마제국의 말기까지 이어졌다.

-

로마제국은 망하지 않았다. 외적의 침입과 기후변화로 분열되었을 뿐이다. 서로마는 종교연합체로 유지되었고, 동로마는 15세기까지 왕조가 이어졌다. 사실 2차세계대전도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로마 패권전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시대도 아메리카로 건너간 서로마 미국와 동로마 소련의 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늑대를 시조로 둔 로마제국은 늘 이렇게 서로를 물어뜯으며 대치했다. 아무리 강력했더라도 양(羊)을 아름답다 여기는 중화제국은 늑대들의 급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양과 늑대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
거대 로마제국이 분리되던 시기 인도와 폼페이 지역의 거대 화산폭발로 인해 기후변화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수백년간 엄청난 추위가 몰아닥쳤다. 거대한 자연앞에서 사람들은 약자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강자와 약자를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강자는 '신=하느님'이었고 그들이 믿고 유지할 분도 오직 '신=하나님'이었다.
-
신은 <구약성서>에서 시작된다. 이집트에서 벗어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지역에 정착한다. '이스라엘'은 '엘신이 다스리다'는 의미로 '엘'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다양한 신들 중 자신들이 모시는 '엘' 신이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했고 엘신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여러 제국의 핍박을 받아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의 계율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그리고 그 계율을 중심으로 뭉침으로서 나름의 자존감과 민족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이 민족적 믿음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도 바울의 전도에 의해 보편적 믿음으로 확대되었다. 이 보편적 믿음은 어려움에 처한 로마 제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급기야 로마제국의 황실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이스라엘의 신은 로마제국의 신민이었던 예수님과 더불어 절대적 신이 됨으로써 국교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민족적인 신과 제국적인 로마를 연결해 주는 강력한 고리였다. 다양한 신을 존중하던 로마가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종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급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기독교가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라는 세개의 신을 모시는 것 또한 묘한 모순이지만 신묘한 선택이었다.
-
급박함을 단순히 거룩한 신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구약>과 <신약>에 있는 치밀한 윤리적인 논리도 한몫했다. <구약성서>의 첫장은 바로 창세기이다. 창세기의 주제는 "부끄러움"이다.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불멸'의 존재였다. 이들은 뱀의 말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아는 필멸'의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 나는 필멸에 방점을 찍었는데 최봉영 샘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즉각 알았다. 불멸과 필멸 앞에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있음을. 이 부끄러움이 바로 '윤리'의 기준이라는 점을.


4.

나는 최봉영 샘께 윤리의 근본적인 기준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부끄러움'이라고 말하셨다. 그때 창세기가 즉각 떠올랐다. 마침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기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생님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은 '원죄'라고 말하셨다. '원죄'는 너무 무서운 말이다.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단어를 기피했던듯 싶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원죄는 죄가 아니라 '사람이 본래 윤리적인 존재'임을 천명한 것이라 말하셨다. 참으로 그렇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름'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멸이다. 부끄러움을 통해 존재를 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를 통해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기준을 갖고 있었다. 이 기준은 예수님을 통해 로마로 전해졌다. 그럼으로써 강한 힘과 말(법)에 의지했던 로마의 윤리기준은 새롭게 재편된다. 신 앞에선 황제의 힘과 말도 부질없다. 그래서 신앞에선 모든 것이 평등하다. 이렇듯 기독교 윤리를 통해 동물적인 사람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된다.
-
프로이트는 이런 윤리적 변화를 더 근본적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모세가 이집트에서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한다. 바로 아멘호텝 4세가 주장한 아톤신이다. 아멘호텝4세는 분열된 이집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신교를 세운다. 태양신인 아톤신을 중심으로 일신교를 세운다.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 일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나왔다고 주장한다.
-
프로이트는 동시에 또 하나의 주장을 하는데 바로 유명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그는 토템적인 터부(금기)가 생긴 근본적인 이유를 이 컴플렉스에서 찾는데, 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나서 자신을 저주하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왕>(소포클레스) 내용을 차용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는 내용이 그리스 신화에 종종 등장한 다는 점에 주목한다. 프로이트는 고대인들이 침팬치와 같은 영장류처럼 아버지가 여러 어머니를 이끌고 있었을 것이라 보았다. 부족의 자녀들은 엄마는 다르고 아버지는 같다. 아버지는 가장 정점에 있는 권력자인데, 자녀들은 아버지 같은 그 권력을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결국 경쟁에 지친 자녀들은 힘을 합쳐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더이상 현실에서 아버지를 공유하지 않고 이상적인 아버지, 바로 가상의 '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근친상간이라는 최초의 금기를 시작한다.
-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그리스인은 아버지를 권력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권력투쟁은 그 중심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자는 강자이며 법이며, 정의와 윤리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성이다. 그러니까 주체성을 갖는 것은 것은 중심이 된다는 것이며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인들의 세상이 시민사회인데... 문제는 이 시민들이 모두 잠재적 경쟁자들이다.
-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신'이 있으니까. 신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 다만 관습적으로 위계적인 신분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 이후로 이조차 사라졌다. 물론 그리스 시민국가에서 로마제국, 중세, 근대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룬 값진 결과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이며 그 신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이런 자부심을 갖고 저런 주장을 했다. 이제 중심성은 끝났다고... 그리고 그의 이런 주장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응축되었다.


5.

'무의식' 개념은 현대 과학의 정설이 되었다. 의식을 강조하는 철학에서도 무의식 개념이 도입되었고, 이젠 일상에서 무의식은 상식이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어. 미안해.."라며 일상에서 '무의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

최봉영 샘과 사회심리학자 한규석 샘과의 통화에는 재밌는 실험사례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원숭이들과 바나나' 실험이다.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발견하고 달려간다. 실험하는 달려가는 원숭에게 물폭탄을 뿌린다. 두번째 원숭이에게도 똑같이 행한다. 그렇게 7번째 원숭이에게 반복한다. 바나나를 먹으려하면 물폭탄 맞는다는 걸 알게된 일곱마리의 원숭이들이 있는 곳에 새로운 원숭이를 넣는다. 그 원숭이는 바나나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나머지 원숭이가 제지하다. 심지어 그 원숭이를 때리면서. 결국 그 원숭이는 경험도 못해본채 포기한다. 이제 경험했던 원숭이들을 한마리씩 빼고 경험하지 못한 원숭이들을 하나씩 늘려간다. 우리에는 결국 바나나-물폭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원숭이들로 채워진다. 그 원숭이들은 바나나에 다가갈까? 물론 다가가지 않는다.
-
나는 이 실험이 여러가지를 시사한다고 본다. 이야기를 듣고 딱 떠오른 단어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벤담의 파놉티콘 이야기로 끌고 가는데, 나는 파놉티콘보다 무의식적인 접근과 회피에 더 끌린다. 최초의 경험이 회피라면 그 경험은 신경패턴으로 연결되어 무의식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새로운 경험을 만나기까지 계속 유지된다.
-
나는 윤리에 이런 무의식적인 것이 강력이 작용한다는 생각이다. 그리스신화와 로마제국, 기독교의 원죄까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들은 하나의 터부=금기가 되어 윤리적 기준으로 차곡차곡 싸여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근본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 예수님은 이 부끄러운 감정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했다. 바로 '사랑'이다. 한쪽 빰을 맞고도 다른 빰을 내미는 사랑. 원수조차도 포용하는 사랑.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푸는 사랑 등등 예수님은 자신과 가족, 부족, 민족을 넘어 제국까지 이르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했다. 이 사랑은 카톨릭(보편)이란 개념을 낳았고 약 100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다 기독교인들은 루터에 의해 이 보편적 사랑조차 비좁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종교개혁의 거센파도가 일어나고 수많은 희생을 통해 보편적 사랑은 세계적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이 사랑은 모든 사람을 근본적으로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 '인권' 개념을 낳았다.
-
하지만 요즘은 이 인권조차 비좁게 여긴다. 수많은 생태파괴를 지켜보면서 인권이 아니라 동식물 등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존엄함을 주목한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 못함을 넘어 사람들끼리 홀로 살아가지 못함을 인식한 것이다. 그렇게 생명평화사상이 등장하고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도 등장했다. 기독교의 윤리 기준이 민족과 제국과 세계를 넘어 전지구와 우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다.
-
하지만 이는 만만치 않다. 왜냐면 앞서 살펴보았듯 서양의 사상이 죄다 중심주의이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제우스 신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최고의 신 등등이 모두 중심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비록 그 중심에 '신'을 놓음으로서 큰 싸움은 피했지만, 그 다음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바로 신에 가까워지기 싸움이다. 이 싸움은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 사상에 접목한 플로티노스의 철학에 잘 담겨있다. 그는 세상을 신을 원뿔의 꼭지점 중심에서 놓고 방사선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이해했는데, 이 신에게 가까워지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
별로 이름이 알려진 철학자는 아니지만 플로티노스의 도식은 아마도 많은 사람의 무의식에 자리잡은듯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의 정점에 다다르고 싶어한다. 그것이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된 것이 바로 파놉티콘이 아닐까 싶다. 이 파놉티콘은 감시자이며 처벌이자다. 강자이며 중심이며 주체이며 주인이다. 그리고 이 주인은 한명일때 가장 효율적이다. 이런 무의식을 갖고 과연 모두가 함께 하는 생태주의가 가능할까?


6.

최봉영 샘과 나는 한국말이 내포하고 있는 '우리' '함께' '어울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왔다. 그리고 이 사상이 인류에게 큰 선물이 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어쩌면 한국말 자체가 담고 있는 사상이, 자기중심성에 빠져 생태사상과 모순을 이루는 자가당착에서 빠져나올 출구전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크게 동의했다.

-

스피노자는 실체를 하나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존재들은 속성과 양태라고 주장하며 실체-양태의 논리를 주장했다. 도올선생은 이 논리가 서양에서 최초로 유일신 논리라고 말한다. 그전의 유일신은 다양한 신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느님이야 말고 최고의 신이라 주장한 것이라면, 스피노자는 아예 다른 신들의 존재자체를 부정한다면서. 나는 도올선생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처음으로 실체하나만을 윤리의 정점에 놓음으로서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로 밀어낸 사상가다. 그럼으로서 사람의 윤리가 자기중심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된다.
-
사회주의 사상의 계보를 따지때 스피노자는 항상 등장한다. 스피노자-루소-칸트-마르크스는 사람의 현실적 평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이때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것이다. 신과 예수님에 대해 근본적인 원죄를 지었기에 사람은 신앞에 늘 부끄럽다는 이상적 평등에서 현실적인 평등으로 나아간다. 계급과 계층의 바탕이 사람이 있고, 사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정립된 것이다. 1차대전 이후 대부분의 왕정이 무너지거나 현실정치에서 물러나면서 이런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이런점에서 1-2차 세계대전이 흘린 수많은 피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나는 일전에 서양말이 모국어인 스피노자가 어떻게 한국말의 어울림을 알았을까 신기해 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국어와 사상적 계보로 나름의 출구전략을 잘 짠 것인듯 싶다. 많은 철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정치>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비교하는데 나는 이 둘은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사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잘 풀어냈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다. 둘 모두 강자들이 동물적 정치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말로서 사람다운 정치를 하기 위해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점에서 스피노자는 서양정치철학에 있어 제3의 전환기적 바탕을 마련한듯 싶다. (제1은 플라톤, 제2는 어거스틴)
-
바퀴를 상상해 보자. 바퀴는 가운데 축과 수많은 살로 이루어져 있다. 굴러갈때 표면에 닿는 바퀴는 살이 무한대로 연결된 둥근 집합이다. 이 살들이 가운데 축과 동일한 길이일때 가장 이상적인 동그라미가 나온다. 이상적인 원이 되어야 바뀌는 가장 잘 굴러간다. 그래서 좋은 바퀴는 가운데 축이 튼튼하고 살들이 축에서 외측의 바퀴까지 똑같이 균등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바퀴가 정치경제와 사회, 정의, 분배, 공정 등에 있어 훌륭한 은유체라 본다.
-
바퀴는 위대한 발명이다. 기술사를 읽어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명된 바뀌는 빠르게 전파되어 대부분의 문명들이 바퀴기술을 알게 된다. 로마의 상징은 전차였다. 불교의 상징을 보면 바퀴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노장 사상의 글에 바퀴가 종종 등장한다. 이렇듯 바퀴는 현실과 이상에서 가장 적절한 모티브로 쓰인듯 싶다.
-
최봉영 샘의 이야기를 들다보면 서양과 중국 사상은 대부분 바퀴 축에 주목한다는 느낌이 든다. 바퀴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 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중심축이 없거나 부실하면 바퀴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바퀴축으로 생각을 하다보니 말도 그렇게 구성된다. 'I eat apple'을 보면 중심축에 있는 내가 eat=살 행위를 통해 사과에 도달한다. 사과는 중심축 나에 있는 하나의 객체가 된다. 먹는다는 관계를 통해 주체와 객체,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중국말도 마찬가지 구조다.
-
반면 한국말은 '나는 사과를 먹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나와 사과가 모두 외측 바퀴에 있다. 나와 사과는 살을 통해 '먹는다'라는 중심으로 모인다. 즉 한국말은 나와 사과가 주체와 객체라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다소 평등한 주체와 주체의 관계를 띄게 된다. 물론 말하는 '나'라는 시작점이 있긴하다. 하지만 '나는 사과를 먹는다'를 '나는 부모님과 사과를 먹는다'로 바꾸면 '나' '부모' '사과'가 함께 '먹는다'는 일을 벌이는 관계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쪽과 저쪽이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주변과 주변의 관계로서 중심으로 향함을 알 수 있다.
-
내가 스피노자의 완전-실체론이 신기했던 이유는 이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서양말은 사상적 중심인 주체가 있어야 주변으로 일이 확장되는데, 그는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간 실체라고 했던 것들을 모두 주변으로 밀어내고 중심에 신=실체만을 두었다. 상당한 묘책인데... 안타까운 점은 그 바퀴는 왠지 잘 굴러가지 않을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무척 안정적이지만 왠지 경직되어 있을듯 싶다. 반면 한국말로 된 바퀴는 왠지 잘 굴러간다. 무언가 평등하면서 역동적인 느낌이랄까. 나의 모국어라 그런걸까. 아니면 한국말 자체가 평등적 사회 사상을 담지하고 있어서일까.


7.

말은 일종의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는 너무 성적인 것에 집중했는데, 다행이 그의 후예들은 성적인 것보다 신경세포에 집중에 프로이트의 주장을 검증한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은 어릴적 경험이 말로 치환되면서 몸에 신경패턴으로 새겨진다.

-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서로 공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감은 신경세포인 거울뉴런을 활성화 시킨다. 거울뉴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보는 나도 같은 신경패턴이 활성화된다. 가령 누군가 무언가를 맛난 것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럽고 입에 침이 고인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거울뉴런 때문이다. 이 패턴이 자리를 잡으면 행동의 맥락에 있는 단서 하나로 그 행동을 연상해 신경패턴이 활성화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단어다. 그래서 우리는 삼겹살을 먹는 모습을 보지 않고, 그냥 '삼겹살'이란 단어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된다. 뇌과학에선 이를 맥락부호화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맥락부호화는 '단어'로서 우리 몸과 마음에 각인된다.
-
단어가 모이면 문장이 된다. 단어와 문장은 모두 말을 옮겨 적은 것이다.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리하면 우리가 오감의 느낌 자질로 어떤 존재의 행동을 경험=체험하면서 그 존재에 공감하고 이를 신경패턴으로 활성화 시켜 말로 고착되어 형성된다. 이렇듯 말에는 한 개인의 무의식만이 아니라 그 집단의 무의식이 고스란이 남아 있다. 물론 말도 바뀐다. 하지만 바탕이 되는 말을 거의 변하지 않는데, 특히 한국말은 서양이나 중국에 비해 그 변화가 덜한 편이다. 그래서 한국말 바탕에는 한국사람들의 오랜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최봉영 샘은 일찍이 한국말의 이런 특성과 속성을 파악하고 한국말을 통해 한국사람들의 생각을 알뜰살뜰 살펴왔다. 한국말의 구조적이 형식과 경험을 담지한 어원적인 내용에서 한국사람들은 중심성보다는 주변성에서 가치를 찾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이를 서양중국사상과 빗대 '온'과 '쪽' 사상으로 구분하셨다. '온'이란 바퀴의 축처럼 어떤 존재가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쪽'은 바뀌의 살처럼 어떤 존재가 주변에 있는 것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안에서 밖으로 오가는 시각은 전형적인 '온'사상인데 서양 사상이 대부분 그렇다. 월러스틴 같은 사회과학자의 세계체제론도 보면 '중심-주변'을 같고 따진다. 반면 '쪽'사상은 바퀴 경계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 경계 안쪽에 있는 모든 것들이 축으로 모여 함께 일을 벌이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존재가 발견된다면 이 경계의 한부분일뿐이다. 그래서 무엇과 무엇 사이를 의미하는 '경계'라는 단어는 쪽사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온 우주는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 우주의 바깥은 없다.
-
최봉영 샘은 한국말에는 온과 쪽을 모두 중요시한다고 강조하신다. 온을 중시하는 단어는 '고루'이다. "고루고루 잘 만들어졌다"고 할때 어떤 사물 자체가 잘 형성되었는 의미다. 쪽을 중시하는 단어는 '두루'이다.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라는 말은 사물들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의미다. 바퀴로 치면 온은 바퀴가 잘 만들어진 상태이고, 쪽은 바퀴가 잘 굴러간다는 의미다. 이렇듯 한국말은 온과 쪽을 모두 중시해서, 고루고루, 두루두루 잘해보려는 태도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서양사상은 중심과 주변이 확실히 구분되어있기에 고루고루에는 탁월하나 두루두루에는 다소 미흡한 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말은 서양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관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8.

이제 글을 정리할 때가 온것 같다. 나는 이글을 '나이'와 '우주'를 언급하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차별과 억압의 가장 중요한 기제다. 특히 나이를 구분해 쓰여지는 존비어체계는 유사신문관계와 형식적 권위주의를 낳기에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큰 장벽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말의 구조와 내용은 전혀 반대다.

-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존비어체계로 한국문화를 분석하는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으로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그 대화가 우주를 향하고 있다. '우주와 존재의 윤리성'의 핵심적인 내용이 존비어체계라는 딱딱한 껍질로 둘러쌓인 한국말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아무튼 나는 그 발견이 반갑고 흥미롭다.

-

구체적인 나이를 초월한 우주적인 대화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시각적인 디자인의 경우 추상화시켜야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데, 말은 구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은유' 덕분이다. 최봉영 샘은 이를 '여김'이라 말한다. 은유=여김은 어떤 개념을 구체적인 경험=체험으로 풀어낸다. 우리 몸의 신경들이 말을 그렇게 몸에 배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할때 적절한 은유=여김을 해야만 소통이 가능하다. 때론 생각지도 못한 은유=여김 덕분에 새로운 존재에 눈을 뜨기도 한다.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문학을 하는 시인만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 철학, 역사, 사회 사상가들도 모두 시인들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모두 시인들의 후예 아닌가.
-
요즘은 시인들만이 아니라 과학자나 디자이너들도 그런일을 한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 소립자나 천체를 보게 하였고, 바이러스 같은 새로운 생명종을 발견한다. 그것들이 존재하게 함으로써 말로서 존재성을 부여하고 결국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이끈다. 디자이너들도 그렇다.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할 방향을 모색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그렇게 여러 이미지를 만들고 생활양식을 만들어 낸다. 둘러봐라. 현대 생활양식은 모두 디자이너들이 만든 것이다. 200년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정말 놀랍지 아니한가. 다만 앞선 시인들과 과학자(디자이너)들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좀 다르다.
-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윤리의 근본적인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 서양말과 한국말의 차이를 설명했는데, 서양말의 윤리는 구조적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나아간다. 힘이 세든 말을 잘하든 그들은 모두 중심에 위치한다. 힘이 약하거나 말을 못하면 주변에 위치한다. 이 위치차이로 인해 동력이 생기고 중심 자리 차지하게 싸움이 일어난다. 가끔은 강한 중심에 의해 원심력이 생기기도 하는데 때때로 일어나는 구심력은 많은 희생을 낳는다. 그래서 동서양의 중용은 모두 이런 원심력과 구심력의 적절함을 추구한다. 반면 한국말에서 중용은 '가운데'이다. 가운데는 가=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함께 아우르는 말이다. 모두가 주변적인 주체로서 임하기에 치열한 중심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공동체를 구성함에 있어 희생도 덜하다.
-
시인들과 철학자들은 모두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은유=여김을 통해 인식을 확대해 왔다. 반면 과학자들과 디자이너들은 더 다양한 존재적 주변을 찾는데 기여하고 있다. 즉 함께하는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점에서 한국말은 과학과 디자인에 친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과 철학의 사유가 연역과 귀납이라면, 과학과 디자인의 사유는 귀추(가설적 추론)에 가깝다.
-
오늘은 종일 일하면서 이 글을 쓴다. 아침에 이 글을 생각하고 쓸까말까 고민이 많았다. 아무리 요약한다고 해도 길어질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길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은 일하는 날이라 일하면서 생각이 뚝뚝 끊어진다. 세어보니 8차례 끊었다. 그래서 읽기에 버거운 글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기록이니까.
-
혹시나 긴 글 읽어주셨다면 고맙습니다. 꾸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