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러 생각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그리고 신천지

by 윤여경

아직 우리나라 전반에 개인주의라는 것이 자리잡지 않았기에 좋고나쁨을 따지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젊은 세대들에게는 개인주의가 자리잡았기에 그 장점과 문제점을 짚어볼 필요는 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인권=인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서로가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인정하기에 여러모로 자유롭고 평등하다. 개인주의는 과거 신분제처럼 종속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을 존중한다. 그것이 옳던 그르든 상관없다. 각 개인이 모두 권리를 갖은 만큼 책임도 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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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사회의 바탕이 되는 공동체 사상은 공리주의이다. 공리주의는 功利라는 한자조어가 말하듯 공로와 이익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공리주의는 과거의 윤리기준을 파기하고 선악을 쾌락과 고통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쾌락은 공로와 이익이다. 우리시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중요하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대부분 공리주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공리주의는 부정하기 어렵고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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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데, 이때 최대다수는 각각의 개인들을 말한다. 쉽게말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최대다수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최대다수가 '전체'는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최대다수의 경계에서 이 다수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리주의의 최대 난제는 이 소수를 어쩌냐는 것이다. 예전 이명박이 좋아했던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문제를 치밀하게 논박하고 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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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델은 결국 롤스의 <정의론>으로 이어진다. 이 지루하고 두꺼운 책을 읽는데 세달은 족히 걸린듯 싶지만 핵심논제는 간단하다. 최대다수를 전체로 만들수 있는 계약방식을 찾자는 것이다. 그 방식도 간단하다. 롤스는 그 사회의 최대 약자가 규칙을 만들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접근때문에 롤스는 공리주의의 완성자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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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센델이 말하듯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세상이 이런 계약을 호락호락 받아들릴리가 없다. 그래서 센델은 롤스를 소개하면서 이를 넘어설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말끝을 흐린다. 나는 이 두권의 책을 읽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1권을 썼다. 이 책은 공리주의에 근거해 디자인 개념의 공공성을 요모조모 따져본 책이다. 이런 방식으로 읽은 이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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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인주의로 돌아오면, 개인주의는 공리주의가 바탕이다. 이 공리주의에는 '최대다수'라는 울타리가 있다. 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익을 위해 최대다수는 최선을 다한다. 최대다수에 속한 사람은 '개인'으로 인정받는다. 속하지 않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개돼지 취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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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에서 논란이 되었듯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공공연히 국민이 개돼지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들이 말하는 최대다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수가 아니라 아주 쬐금의 소수란 의미다. 숫자로 말하면 약 10%정도가 최대다수=개인이고 나머지 90%는 공리주의 울타리 밖에 있기에 개인이 아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90%의 사람들이 공리주의 울타리를 무셔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10%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경쟁할까? 90%의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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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요리조리 생각해도 가능성이 너무 낮다. 이세상의 양극화가 계속 진행되듯이 세상은 개인주의-공리주의 완성자 롤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반대로 가고 있다. 사실 신천지 등 이단이라 불리는 종교들은 대부분 공리주의 전략을 쓴다. 이 안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며. 이미 공리주의 태도가 내면에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이런 이단적 종교들이 활약할 수 있다. 즉 개인-공리주의는 때론 집단이기주의의 강력한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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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 없는 환상은 버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센델이 던진 의문에서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과연 새로운 대안은 있을까. 그 대안은 중국의 오랜 사상, 유교에 있을까? 인도의 오랜 사상, 힌두교와 불교에 있을까? 유럽의 오랜 사상 기독교에 있을까? 아니면 역시 마르크스 형님처럼 다 때려부수고 혁명을 하는 편이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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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최봉영 샘의 책을 소개하면서 나는 초원의 사상인듯한 '우리주의'를 발견했다. 과거 몽골의 수장제와 중국의 세습제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우리주의'는 몽골의 수장제와 가까운듯 싶다. 어쩌면 여기에 새로운 대안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주의'적 태도가 우리가 흔히 쓰는 한국말에 바탕을 두기에 아주 친숙하다. 우리가 그걸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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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을듯 싶다. 집단적으로 형성된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신천지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듯 어떤 이념적 태도에 빠지면 쉬이 빠져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개개인의 생각은 제법 바꾸기 쉽다. 신천지는 그런 전략으로 포교를 해왔다. 난 이들의 포교전략을 보면서 이 전략이 긍정적으로 활용된다면 참으로 유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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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전략을 선뜻 선택하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신천지는 자신들이 신천지라는 사실을 숨긴다. 포교 목적을 숨기고 접근한다. 거짓으로 시작하는 포교전략... 도구와 수단이 거짓인데 목적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어쩌면 이미 개인-공리주의가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이 전략을 치밀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왕국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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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천년왕국의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코로나와 신천지 그리고 우리 사회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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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말 그리고 신천지]


코로나19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가 말을 배워가는 과정을 관찰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는 갓 6살인데 12월생이라 5살에 가깝다. 3살만 되도 아이는 자신의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는데 5살이 되니 의사 표현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주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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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체성은 말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련 발달심리학자 비고츠키는 7살이 되면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하면서 주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내 보기엔 7살까지 기다릴것 없이 5살도 이미 주체성이 형성된듯 싶다. 5살 아이는 (들리는) 혼잣말을 하는데, 재밌는 점은 있지도 않은 말을 마구마구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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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말을 통해 머리속에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 듯 싶다. 우리는 어떤 무서운 대상을 말로 만들고 자신이 그 대상에 빙의되어 서로를 공격한다. 공격보다는 그 대상만들기에 골몰하는 편인데, 벌써 수없이 많은 말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호랑사, 방구기, 백곡기, 꽥꽥꽥, 박사 등이 있다. 호랑사는 호랑이와 사자를 합친 조어이고, 방구기는 방구로 공격하는 무서운 무언가이다. 호랑사보다는 방구기가 더 세다. 꽥꽥꽥는 '꽦'하면서 공격한다. 백곡기는 왜 생긴 이름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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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새로운 대상들을 끝없이 만든다. 아이는 전혀 맥락없이 소리나오는대로 지껄여 이름을 짓고 깔깔 웃는데... 자신도 그 이름이 너무 어이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맥락 없이 지은 이름은 금방 까먹어서 "아까 우리가 뭐라고 했지?" 서로 물어보면서 대답을 찾는다. 그러면서 또 어이없이 웃는다. 놀이하면서 이런 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즉 수많은 가상적 존재와 세계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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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람은 아주 어릴때부터 말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말로 어떤 존재를 가정하고 그 존재에 기반한 세계가 형성된다. 말을 잊거나 말이 바뀌면 존재가 사라지거나 세계가 바뀐다. 이건 일종의 놀이같다. 아이는 몸놀이에 기반해 말을 배우고 익혀 새로운 말놀이를 통해 가상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 가상 세계의 규칙아래서 몸놀이를 한다. 나는 이 말놀이 몸놀이가 어른들의 세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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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천지에 대한 영상을 몇개 찾아보았다. 그들은 우리 아이와 같은 말놀이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몸놀이를 하고 있는듯 하다. 영상을 보는 내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이 말놀이에 빠진 사람들이 남이 만든 허황된 세계에 종속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미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했거나, 자신만의 세계가 무너진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허황된 말들에 속아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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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교적 낭만적인 사람이다. 남들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서로의 주체성을 존중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잠시잠깐 계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들이 시련을 겪는 것은 올바른 계몽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올바른 계몽이란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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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사람들은 이 와중에도 삼삼오오 모여 공부를 한다고 한다. '공부'는 참으로 좋은 것인데... 이들의 공부는 왜이리 나빠보일까...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인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혐오하도록 이끌까... 만약 이들의 열정이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공부로 향한다면,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정말 대단할텐데... 어쩌면 계몽이 필요한 세상이 오고 있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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