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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Feb 23. 2021

시각언어 3강-2

기본층위 범주의 기호들과 소통

(6) 기본층위 범주 기호들의 가족관계(그것/그림/글/그릇) 그리고 기호놀이(디자인)의 바탕과 방법

1) 기본층위 범주의 시각기호들

언어의 바탕은 경험입니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언어를 이해할 수도 있고 소통할 수도 있죠. 경험이 없으면 언어를 이해할 수 없고, 경험이 다르면 소통이 안됩니다. 300년전 사람들은 '자동차'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자동차'라고 말할때 우리는 자동차를 단순히 자동차 아이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를 처음 탓던 느낌, 부릉거리는 엔지소리, 문을 열고 닫고 했던 느낌, 자동차 내부의 공간들과 요소들, 운전경험 등등 자동차와 관련된 여러 경험이 동시에 활성화 됩니다. 축적된 경험들이 신경패턴으로 연결되어 몸에 새겨졌기 때문이죠. 자동차 경험 신경패턴은 사람들 각자가 다르기에 아주 구체적인 자동차나 브랜드나 추억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잘 안되죠. 또한 300년전 사람들이 그랬듯 '탈것'이라는 보편의 세계에서는 자동차만이 아니라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우주왕복선 같은 수많은 탈것들이 있기에 이 또한 소통이 쉽지 않습니다. 이렇듯 경험 수준에 따라 소통 여부가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보편적인 소통 영역인 기본층위 범주의 범위도 달라집니다.

기본층위 범주 개념을 확대해 보죠. 레이코프와 존슨은 오로지 보편적 소통이 가능한 일상어들을 '기본층위 범주'로 두었지만 일상어만이 아니라 시각매체까지 포함해 소통이 잘되는 모든 기호를 '기본층위 범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일단 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경험의 바탕이 비슷해야 합니다. 경험의 바탕이 비슷하면 레이코프와 존슨이 배제한 아주 구체적인 경험도 기본층위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가령 친구와 둘이 놀이공원에 갔던 경험이 있다면 그 둘은 만날때마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적어도 둘은 기본층위 범주를 공유하는 셈이죠. 하지만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다른 친구와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을 통해 둘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겠죠. 이렇듯 경험에 따라 둘과 셋의 소통에 있어 기본층위 범주 영역이 다른 것이죠.   

저는 기술과 디자인 그리고 예술의 근본적인 역할이 이 기본층위 범주의 확대에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생각은 감각지각을 통해 형성된 그림기호와 생각을 통해 편집된 문자기호에 기반합니다. 생각 아래에 있는 경험과 기호들은 새로운 생각의 토대가 되는 기본 자료들이죠. 예술과 기술, 디자인은 새로운 기호의 가능성을 높히거나 만들어냄으로써 이 토대 자료를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가령 '자동차'라는 기호는 현대 기술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자동차는 디자이너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되었고, 예술가들은 기존 자동차의 의미를 해체해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과 예술, 디자인은 '자동차'라는 기호를 만들고 확대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동차' 기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요.   

그림삼각형에서 왼쪽 꼭지점이 사실적 경험에 해당됩니다. 사실적 경험은 18세기 이전에는 정교한 소묘와 유화였고, 19세기 이후에는 사진과 영상이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기술이 등장해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홀로그램과 같은 기술이 일상화 되면 사실적 경험 매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경험으로 기술발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기본층위 범주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죠. 시인과 철학자들은 수많은 언어를 재발견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죠. 덕분에 오른쪽 꼭지점이 이동해 문자삼각형이 확대됩니다. 이 또한 기본층위 범주의 확대입니다.  

이렇게 확대되는 기본층위 범주를 잘 지탱하려면 역시 경험 바탕이 탄탄해야 합니다. 풍부한 경험바탕을 기반으로 풍성한 생각을 통해 각자가 가진 기본층위 범주가 확대되고, 이를 통해 크고 참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죠. 하지만 경험은 혼자만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할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관점을 주고받으며 개인의 한계를 넘을 수 있죠. 이렇듯 경험을 기반으로 추억과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이 공동체가 시공간으로 축적되면서 개인보다 훨씬 확대된 기본층위 범주를 형성하겠죠. 우리는 이를 집단지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소통하는 말과 이미지들은 대부분 집단지성의 산물입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강조라며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악'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럼 그녀가 비판한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의 관료들은 정말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요? '생각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가 '어떤 바탕에서 생각하냐'입니다. 생각의 바탕이 어떠냐에 따라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나쁜 생각도 할 수 있죠.

사람은 대사와 감각, 지각, 생각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데카르트처럼 수직의 삼각형으로 구분한다면 생각의 바탕에는 대사와 감각, 지각이 있습니다. 생각은 감각 경험에 따른 모방과 이에 따라 지각적으로 재현된 그림 그리고 집단지성으로 축척된 말과 글이 기반되어야 합니다. 만약 감각경험과 지각재현, 집단지성이 빈약하면 당연히 생각도 빈약하게 되고,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나쁜 생각'입니다. 악의 평범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빈약한 상태입니다. 감각경험과 재현 그리고 지성이 풍부한 집단 속에선 아무래도 빈약한 생각을 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바탕, 즉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재현하며, 많은 사람들과 대화(말)하고 책(글)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생각의 바탕이 튼튼해 질 것입니다.

2) 바탕치기 유형과 가족유사 범주

경험으로 새겨진 인과관계, 바탕치기

'바탕치기'에서 '치기'란 채로 무언가를 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모래를 채로 치면 굵은 자갈을 걸러내고, 고운 모래만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고운 모래는 유용합니다. 이렇듯 치는 행위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입니다. '눈치'는 채가 눈이 된 것입니다. 수많은 시각 정보를 눈으로 쳐서 중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죠. 

바탕치기도 눈치처럼 중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다만 '바탕'은 시각경험만이 아니라 온갖 경험을 모두 포함합니다. 앞서 말한 바탕경험에는 색성향미촉이 있었습니다. 우리 몸은 말초신경에서 들어오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온갖 신체정보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정보를 걸러냅니다. 이 과정은 모두 무의식 중에 이루어집니다. 몸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을 근거로 새로운 경험 중 중요한 것만을 걸러내는 것이죠. 중요한 정보가 몸에 새겨진다는 의미에서 저는 이를 '새김 바탕치기'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때 새겨진다는 것을 신경과학적으로 말하면 신경패턴을 형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새겨진 신경패턴은 일종의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시각정보는 시각이미지를, 청각정보는 청각이미지를 형성합니다. 물론 이 감각들은 사람들이 임의로 나눈 범주일뿐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세모와 원에서 공감각을 느꼈듯이요.

경험에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새김 바탕치기 과정은 '인과관계'에 의해 형성됩니다. 영어로는 논리(로고스), 한국말로는 "~하는 바람에"입니다. 모두 문장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현재진행의 인과관계를 '까마귀가 날아가는 바람에 배가 떨어졌어"라고 느낍니다. 어떤 결과를 판단할때 자신이 집중해서 경험한 것 중 기존의 경험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자동으로 걸러내는 것이죠. 만약 기존 경험이 다르면 새김 바탕치기도 달라집니다. 나는 배가 떨어진 이유가 '까마귀가 날아가면서 나무를 흔들어서'라고 느꼈는데, 다른 사람은 나무가 흔들려서가 아니라 그냥 우연히 떨어졌을 뿐 까마귀랑 아무 상관도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현상을 경험하더라도 기존 경험에 따라 각자가 인과관계를 다르게 새길 수 있죠. 

두번째 바탕치기는 '여김 바탕치기'입니다. 여김 바탕치기란 새김 바탕치기를 의식하는 행위입니다. 경험이 감각적이고 새김 바탕치기가 지각적이라면, 여김 바탕치기는 생각에 해당됩니다. 이 '생각'을 영어에서는 은유(메타포)라 말하고, 한국말로는 '여김'이라 말합니다. 이 과정은 사람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개와 고양이 등 다른 동물들도 새김 바탕치기를 근거로 여김 바탕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의식은 사람처럼 정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각경험을 묻고 따져 말로 풀어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띈 말로 풀어내죠. 

여김 바탕치기는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근거로 여기는 바탕치기입니다. 가령 사람들인 어떤 액체를 경험한다고 해보죠. 사람은 액체의 형태와 소리, 냄새, 맛에서 어떤 공통적인 경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액체에 손을 담그는 순간 손이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죠. 이 느낌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린다'는 느낌을 갖고 액체를 '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물렁물렁'이란 말도 물의 특징을 잘 반영합니다. 즉 한국사람들은 액체의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며 그때그때 묻고 따져 '물다' '물렁하다'의 느낌을 걸러내고 그 대상의 이름을 '물'이란 말로 여긴 것이죠. 이렇게 어떤 경험 중 가장 공통적인 것을 발견해 공공의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 '여김 바탕치기'입니다. 

두번째 여김 바탕치기는 경험과 무관한 것입니다. 의미요소가 모두 제거된 추상적인 요소들을 상상하시면 좋습니다. 이 추상은 '모름'이기에 아무것이나 가능합니다. 가령 '노속'이라는 전혀 의미없는 말이 있다고 상상해보죠. 어른이 유치원 아이에게 "너 노속 먹어봤니?"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리둥절하겠죠. 다시 어른은 "노속 맛있어!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나 노속사줘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이는 '노속'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아이에게 '노속'은 문장의 맥락속에서 실제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 존재는 '먹는 것'이고, '아이스크림'과 유사한 촉감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맛있다'는게 중요하죠. 그럼 엄마는 어리둥절해 집니다. "얘야 노속이 뭐니?"

최봉영 선생님은 이를 '노속치기'라 말합니다. 노속치기는 경험이 없는 추상화된 언어를 마치 경험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행위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분명하게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마치 경험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노속'을 먹어 본 것도 없으면서 마치 먹어봤던 것처럼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죠. 이렇듯 노속치기는 경험과 무관한 것을 갖고 경험이 있는듯 말하는 행위입니다. 일종의 거짓말이죠. 

한국말로 거짓말은 '겉짓'을 의미입니다. 속을 보여주지 않고 겉모습만 보여주는 행위죠. 기표와 기의를 얘기하면서 사람은 대상을 판단할때 겉과 속의 관계로 판단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겉만 알고 속을 모르거나,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했을때 그 대상을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겉모습과 속성이 다른 기호는 논리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고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표는 겉보기이고, 기의는 속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즉 기표는 겉으로 보이는 감각들이고, 기의는 속 안에 들어있는 속성 혹은 의미를 말합니다. 겉보기와 속들이가 일치하면 그 기호는 이해도 잘되고 소통도 잘되죠.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런 기호들을 기본층위 범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속은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겉만 알 수 있죠. 한국사람은 이 겉과 속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과 밖은 경험의 중요한 범주입니다. 모든 사람은 대상을 안과 밖으로 구분해 사물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문화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서양과 중국 사람들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안에서 바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안과 밖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하고 안쪽과 바깥쪽이 상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안쪽과 바깥쪽은 늘 함께 해야한다고 생각했죠. 두 경우는 인식과 태도에 상당한 차이를 만듭니다.

안쪽과 바깥쪽을 둔다는 것은 안쪽과 바깥쪽을 독립적인 상태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안쪽은 '속'이고 바깥쪽은 '겉'입니다. 우리는 안쪽은 알 수 없습니다. 나의 안쪽인 내 맘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반면 바깥쪽인 '겉'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쪽만으로 상대나 대상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겉만 알 수 있는 '겉짓'이 '거짓'이라고 여겼습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으면 속이 비었다고 여겨 '속빈=속인'다고 말했죠.


원형에서 여겨진 가족유사성 범주형성

겉은 드러난 상태입니다. 이 겉이 드러난 실체를 '것'이라 말합니다.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라 여기기 앞서 그냥 있는 존재입니다. 이쪽에 것이 있으면 '이것'이고 저쪽에 것이 있으면 '저것'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없으면 '그것'이라 말합니다. 이때 '그'는 것이 실체로서의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그'라고 말할때는 뭔가 의미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 허전한 상태입니다. 뭔가 빈 느낌이랄까요. 허전한 상태의 '그'는 기억은 있는데 뭔가 떠오르지 않을때 주로 나오는 말입니다. 기억이 잘 나기 않으면 "그거 있잖아..."라고 말끝을 흐리며 상대방이 '그'에 해당하는 말=의미를 해주길 기대합니다.

'그'는 말의 원형입니다. 이 원형에서 소리와 형태가 유사한 가족어들이 만들어집니다. 최봉영 선생님은 이를 '바탕치기'라고 말합니다. '치기'는 채로 모래를 치듯 비슷한 것들을 고르는 과정입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상황에 비슷한 소리를 쳐서 말을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말들이 '바탕치'이고 이 바탕치들은 바탕뜻을 공유합니다. 바탕뜻을 함께하는 가족말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레이코프와 존슨이 말한 가족유사성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의 원형인 '그'는 그 가족말들의 성입니다. 마치 '윤여경'의 '윤'처럼요. '그'를 성으로 가진 대표적인 말이 '그릇' '그림' '글'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언급했던 '그림'과 '글'이 결국 '그'라는 성을 가진 한가족이었던 셈입니다. 즉 '그림'과 '글'은 바탕뜫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릇'은 '그'라는 빈공간에 실체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릇에는 밥도 담고, 국도 담고, 물도 담을 수 있죠. 실체가 있는 것들은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릇'의 가족인 '그림'도 당연히 비슷한 의미겠죠. '그림'은 '그'에 '림=임'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임을 그리워하면 그 임을 그림(임)에 담습니다. 즉 그림은 사라지는 기억이 두려워 그리운 임을 담아 기록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죠. '글'은 '그'에 'ㄹ'을 담는 것입니다. 'ㄹ'은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종 소리를 담은 매체가 '글'이니까요.  

'그릇'과 '그림' '글'은 근본적으로 '그'라는 바탕을 함께하기에 모두 무언가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어 놓으면 그 그릇을 쓰는 사람은 무엇이든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이라야 하죠. '그림'은 '이미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누구가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자신의 임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임을 혹은 다른 이미지를 담죠. 마치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릇에 마음대로 담는 것처럼요. 비평가들은 이를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인 사진과 같은 그림에서는 보는 사람 마음대로 이미지를 담을 수 없습니다. 아이콘화된 그림에는 좀 더 자유롭게 이미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추상화된 심벌이라면 완전히 자유롭게 이미지를 담을 수 있겠죠. 추상화된 심벌은 생각하고 편집하는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도 똑같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편집할 수 있습니다.

'글'은 '소리'를 담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뜻'도 담을 수 있죠.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의 소리를 읽을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뜻을 담을 수 있죠. 물론 이 뜻은 글을 쓴 사람의 뜻 위에 담는 것입니다. 이를 번역 혹은 독해라고 말합니다. 기본층위 범주의 단어들로 쓰여진 글은 이해하기 쉽고 딱히 뜻을 더 담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단어들로 엮인 철학적인 글은 읽을 수는 있지만 독자가 그 뜻을 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림이든 글이든 보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이미지를 담거나 뜻을 담아야 의미가 생깁니다. 이것이 '그' 가족, '그릇'과 '그림' '글'의 쓰임새이죠.

정리하면 기본층위 범주에 해당하는 시각기호들은 모두 '그' 가족입니다. 사진과 영상 등 직접경험과 가까운 시각기호는 '그릇'에 해당됩니다. 사진은 아무래도 실체성에 가까운 시각기호니까요. 아이콘은 실체성이 단순화된 '그림'입니다. 아이콘에서 의미요소가 모두 제거된 추상적인 심벌은 '그것'에 해당됩니다. '그것'의 '것'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기에 추상적인 심벌에는 모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글'은 추상적인 심벌에 소리를 부여해 문자로 만들고 다시 이를 조합해 말소리를 표현한 시각기호죠. 그래서 글에는 '말뜻'이 담기게 됩니다. 

말은 공공적인 청각기호입니다. 이 말이 글로 옮겨지면 시각기호가 되죠. 그래서 글 또한 공공적입니다. 여기서 '공공적'이라는 말은 '공통경험'을 의미합니다.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말은 '공공적'일 수가 없죠. 앞서 언급한 '노속치기'가 그렇습니다. '노속'은 공통의 경험이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더라도 아이와 엄마는 그 경험을 공유하지 않기에 그 말의 공공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속치기로 만들어진 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거짓이 들통나면 금방 사라지죠. 거짓은 겉짓이고, 들통난다는 것은 속이 통채로 들여다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노속치기로 만들어진 말의 속을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말은 반드시 공통경험에 근거해야 합니다. 공통경험을 근거로 여김 바탕치기를 해 만들어진 말은 오래지속됩니다. 물론 그 경험이 유효할 경우에만 지속됩니다. 나중에 색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과거 '살색'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연한 주황색을 살색이라 불렀죠. 그런데 이 색이름이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살색이 '살구색'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공통경험이 달라지면서 색이름 즉 말이 달라진 것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색'이라 말합니다. 공공적인 말은 쉽사리 바뀌지 않거든요. 하지만 차차 '살색'이란 말은 사라지고 '살구색'이 남겨질 것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바탕치기

추상적인 기호와 요소들이 있은 이 층위가 예술과 디자인이 일어나는 층위입니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은유를 통해 추상적인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예술과 디자인에 있어 '은유'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은유를 논하려면 먼저 말과 기호가 형성되는 전체적인 과정을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경험적으로 창발된 인과관계"와 "원형과 가족유사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용어들은 인지언어학자 레이코프와 존슨의 <몸의 철학>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 두개의 원리가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첫문장은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마음은 신체화 되어 있다"

"의식은 무의식에 지배받는다"

"추상적 용어는 은유로 소통된다"

이 세문장은 언어가 어떻게 인지되고 이해되며, 소통되는지를 알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입니다. 이 세문장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단어는 경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체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체험주의'라 말합니다. 기존 언어학은 언어가 생성되는 근본원리가 있었을 것이란 근거에서 비롯된 생성언어학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보편적일 것이라 생각했죠.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언어학자가 노암 촘스키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여기에 반발합니다. 이들은 언어는 어떤 보편적인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경험 즉 체험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각자 혹은 집단이 어떤 경험을 공유하냐에 따라 언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언어가 만들어지는 보편적인 공식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죠. 하지만 우린 여전히 사람 몸이 어떻게 세상을 인지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그 원리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나마 신경인지과학에서 그 원리를 살피고 있죠. 그래서 레이코프와 존슨의 인지언어학을 신경언어학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신경연결은 감각에 의해 계속 변화합니다. 연결이 강화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죠. 이 모든 과정은 그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경연결이 복잡하고 그만큼 언어감각도 뛰어납니다. 언어는 곧 생각이자 마음이기에 레이코프와 존슨은 "마음은 신체화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이죠. 여기서 마음은 생각, 언어를 의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를 존재라고 말했죠.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마음이 신체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눈치챈 사람은 프로이트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신경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무의식을 발견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했죠. 즉 무의식은 신경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의식은 무의식에 지배받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독창적 발견은 바로 '은유'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소통할때 주로 은유를 사용합니다. 심지어 일상어에서 조차 은유는 아주 흔합니다. 가령 "인생이란 무엇인가?" 질문해보죠. 어떤 사람이 "인생은 마라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즉각 인생을 마라톤의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출발하고 꾸준히 달리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앞서고 또 뒤처지고... 성실히 달리면 결국 도착하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죠. 짧게 말하면 마라톤 경험의 개념구조를 통해 인생의 개념구조를 살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스포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스포츠의 개념구조가 연상됩니다. 편이 갈라지고 승부를 내서 패자와 승자가 생기는, 이를 통해 부와 명예를 차지하는 과정으로서 인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라톤과 스포츠는 요즘사람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모호한 보편어에 경험적인 개념을 적용하면 모호함이 다소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레이코프와 존슨은 "추상적 용어는 은유로 소통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은유는 좋은 은유와 나쁜 은유가 있습니다. 좋은 은유는 좋은 생각을, 나쁜 은유는 나쁜 생각을 유도합니다. 가령 '대화'의 경우 '대화는 따뜻함이다"라고 말하면 대화를 통해 공감을 얻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대화가 하고 싶어집니다. 반면 "대화는 전쟁이다"라고 말하면 바로 '논쟁' 떠올리죠. 당연히 이런 은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대화를 꺼리게 되겠죠. 때론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은유를 통해 기존 개념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은 뭔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전쟁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전쟁으로 여기는 순간,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됩니다. 이런 은유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겠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전쟁 은유를 통해 좋은 사랑 개념이 변한 것입니다. 즉 은유는 언어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경험하면서 인과관계를 따져봅니다. 다양한 인과관계 중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것을 언어로 가져옵니다. 앞서 "물"의 경우 "물다"라는 성질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얼굴그림에서 눈과 입이 가장 중요한 의미요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얼굴아이콘에서 눈과 입은 끝까지 고수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험적으로 창발된 인과관계"입니다. 여기서 "창발"은 영어로는 "emergence"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이 난다"라고 말할때 "난다"가 바로 창발=emergence죠.

"물과 물다"에서 '무게' '무겁다' 등의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물'이라는 원형에서 '무게' '무겁다'라는 소리가 유사한 가족말들이 나온 것이죠. 마찬가지로 얼굴의 '눈과 입'은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전조등은 마치 눈처럼 여겨져 얼굴을 연상시키죠. 이처럼 눈과 입을 통해 다양한 사물들에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기 콘센트에서조차. 얼굴에 있어 '눈과 입'은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형적 형태와 유사한 가족형태들은 하나의 범주를 구성합니다. 이것이 "원형과 가족유사성에 의한 범주형성"입니다.

이처럼 경험과 신경, 은유는 언어형성의 핵심 고리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형성되는 원리는 인과관계와 유사성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시각기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사실적 시각기호 '사진'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그림에 보면 '윤여경 얼굴 사진'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이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윤여경이 아니라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눈과 입'입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윤여경이 아니라 얼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윤여경을 의미하는 요소들, 안경, 눈썹, 코 등을 과감하게 생략합니다. 무자비한 생략 과정에서 요소의 위계질서중 가장 높은 눈과 입은 끝까지 살아남죠. 다행이 입의 표정은 살렸습니다. 디자이너가 얼굴 표정도 중요하게 여겼나 봅니다.

단순화된 그림을 기호학에선 아이콘이라 말합니다. '아이콘'은 서양 중세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중세 기독교의 신과 성인을 표현한 그림을 '이콘'이라 불렀거든요. 즉 아이콘을 우리말로 하면 '신성한 그림'입니다. 신과 성인은 '아이돌'이겠죠. 그래서 우리시대 아이돌 스타들이 신성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과거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고 싶었지만 요즘은 스타가 되고 싶어합니다. 아이콘, 아이돌은 모두 사실적 경험이 재현된 그림이자 조각같은 감각이미지입니다. 이 감각이미지는 즉각적으로 소통되기에 강력합니다. 보는 즉시 어떤 감각을 유발하죠. 게다가 사실적 경험에 비해 해석도 자유롭습니다. '즉각적 이해'와 '자유로운 소통'이라는 유용성 때문에 역사에서는 수많은 아이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아이콘들이 생산되고 있죠.

이 아이콘의 의미적 요소들이 완전히 해체되어 추상화되면 완전한 자유로움을 갖게 됩니다. 의미요소들을 사라졌기에 즉각적 이해는 포기해야 하죠. 그래서 추상화된 심벌로 소통하려면 반드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만 합니다. 아니면 세종처럼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거나요. 세종은 일찍이 이 요소들을 활용해 '한글'이라는 문자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자로 갖고 말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은 시각이미지에 비해 섬세한 범주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보편성도 아주 높죠. 문자로 보편성이 높은 글을 기록하고 범주를 구분하고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속적으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죠.

말과 글은 문화를 지속시킬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말과 글을 배웁니다. 이 말과 글에는 문화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이는 말과 글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경험을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경험은 다시 새로운 시각기호를 만들어내겠죠. 그리고 단순화된 시각기호는 추상화와 보편화 과정을 거쳐 다시 말과 글로 재탄생해 문화를 이끌어가겠죠. 이렇게 청각적 언어와 시각적 기호가 순환되며 일상의 언어와 생활양식이 변화합니다.

3) 언어의 바탕과 방법 그리고 목적

사진, 아이콘, 추상적 심벌 그리고 문자는 우리 시대 기본층위 범주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시각기호입니다. 이 앞서 나왔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검은 점과 흰 점의 1:1연결은 '사실적 경험', 1:다수(多)의 연결은 시각이미지 '아이콘', 다수(多):다수(多)의 무작위 연결은 추상적 심벌과 문자, 다수(多):1의 연결은 단어에 해당됩니다. 이 시각기호들은 모두 감각경험이라는 바탕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사진과 아이콘, 문자는 추상적 심벌을 해석하는 바탕이 됩니다. 바탕안에 또 바탕이 있는 프랙탈 구조죠.

프랑스에는 아날학파라는 역사연구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 귀족 중심으로만 기술되는 기존 역사적 연구를 비판하고 기후와 지역적 특성, 경제와 사회의 구조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역사연구를 크게 3개의 층위로 구분합니다. 맨 아래는 장기지속 층위입니다. 지역과 기후 등 자연적 특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자연적 특성은 쉽게 변화하기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지속적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화산폭발이나 행성충돌, 오존층 파괴 같은 거대한 사건이 생기면 기후변화로 인해 지역적 특성이 변화합니다. 이런 지역적 바탕을 고려해 그 지역의 역사를 살피야겠죠. 두번째 층위는 중기지속 층위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인구변화와 기술변화, 계절 등 같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점진적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들이 축적되어 문화의 양상이 바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단기지속 층위입니다. 이 층위는 전쟁이나 질병 등 그때그때 두드러진 사건들입니다. 침입, 전쟁, 내전 등은 내부의 권력구조를 바꿉니다. 질병 등은 일상의 변화를 불러오죠. 이런 변화들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죠. 사건은 늘 지속되는 기반위에서 일어납니다. 때문에 역사가는 주요한 사건만이 아니라 장기지속과 중기지속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도식을 말기호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언어적 측면에서 단기지속은 쓰임뜻에 해당됩니다. 말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습니다. 기분나쁜 욕설도 친구관계에선 때론 애정표현이 될 수 있으니까요. 쓰임뜻을 쪼개면 짜임뜻이 됩니다. 시각언어 1강을 시작하면서 저는 '학'과 '습','시각''언어'의 짜임뜻을 살폈습니다. 의미단위의 음절로 쪼개면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개념적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짜임을 이루는 각 음절의 의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바탕뜻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습'은 한국말로 '익힌고 배운다'는 의미인데, 익히는 것은 음식을 익히는 행위에 해당되고, 배움은 몸에 무언가 배이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바탕뜻을 알려면 말과 신체적 경험을 연결해야만 합니다. 바탕뜻은 말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소리로 바탕을 쳐서 이 '말소리'를 만들었겠죠. 이 말소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졌기에 우리가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 말소리 원현은 경험적 무의식입니다. 수천년동안 우리는 그 무의식을 의식하지 못한채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이죠. 그래서 바탕뜻을 알려면 다소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바탕뜻을 역사로 치면 장기지속과 유사합니다. 그럼 중기지속은 짜임뜻, 단기지속은 쓰임뜻이라 볼 수 있겠죠. 이 3개의 층위를 다시 시각기호에도 연결지어 보겠습니다. 시각기호는 기본적으로 언어이기에 경험적 바탕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실성에 가까운 직접경험이 시각기호의 바탕입니다. 이를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인덱스-시그널이죠. 과거 직접경험에 가장 가까운 시각기호는 정교한 조각이나 소묘였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고는 사진과 영상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요즘은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그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시각기호의 바탕이 점점 깊어지고 있죠.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나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그림 잘 그리냐?"고 물어봅니다. 이때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얼마나 사실처럼 묘사하냐입니다. 소묘를 잘하고 조각을 잘하면 미술적 재능가 있다고 여기죠. 이런 인식은 카메라 덕분에 사실적 묘사가 필요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각기호에 있어 사람들은 바탕인식이 '사실성'에 있기 때문이죠.  

두번째 중기지속-짜임뜻 층위는 글과 그림입니다. 그림은 사실적 경험을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은 감각이 지각으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지각적 재현인 그림을 통해 시각경험을 한 사람이 어떤 의미요소를 중요시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죠. 특징을 잘 잡아 빨리 그리는 것을 크로키라고 말합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이 크로키를 잘합니다. 신문의 만평을 보면 선 몇개로 정치인들의 얼굴을 비슷하게 잘 그립니다. 글은 생각을 그림이 아닌 문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소설가는 긴 호흡으로, 시인은 짧은 호흡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합니다. 철학자와 과학자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대부분 글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합니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죠. 단순한 그림과 글을 가장 보편적인 소통 매체입니다.  

반면 추상적인 심벌은 다소 다루기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은 미술가와 디자이너들입니다. 전통적으로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주로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사진과 영상이 발명되면서 이젠 추상적인 요소들을 즐겨 사용합니다. 앞서 얘기했던 현대예술가들과 현대디자이너들처럼요. 시각언어로 치면 점선면입체 등의 추상적 심벌들이죠. 이 심벌들은 아래 층위의 시각기호들에 비해 의미 요소가 거의 없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나 독자들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고요. 해석이 자유로운만큼 하나의 의미가 오래동안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층위를 단기지속-쓰임뜻 층위라 볼 수 있죠.

추상 층위의 요소들은 과거 지배자들이 좋아했습니다. 특히 거대 집단을 유지하는 주술사나 종교지배자들이 이 층위의 요소들을 활용해 소통했습니다. 앞서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보았던 머리는 새이고 몸은 사람인 그림은 주술사가 그린 그림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반인반수의 이 형상을 신이나 조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종교적 상징, 기독교의 십자가나 불교의 만다라, 유교의 태극 등도 이런 층위에 해당되죠. 이 시각기호들을 추상성이 높아 의미를 부여하기도 좋고, 그 의미를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편성이 가장 뛰어난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상징이 잘 작동하려면 반드시 잘 다듬어진 언어적 바탕이 있어야합니다. 믿을만한 바탕이 있어야 그 위에서 맘껏 놀 수 있으니까요. 축구경기를 상상해 보세요. 만약 축구경기의 규칙이 없는 상태에서 과연 축구경기가 가능할까요? 난투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규칙을 모르면 축구경기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죠. 축구경기가 재밌는 것은 나름의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규칙의 바탕에서 축구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예술과 디자인은 일종의 언어게임(놀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언어게임은 바로 모두가 공유하는 언어규칙, 즉 언어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의미요소가 제거된 추상적인 심벌 영역이 언어놀이를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어떤 규칙아래서만 허용됩니다. 그런점에서 언어의 바탕=규칙을 아는 것은 예술과 디자인을 즐기고 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축구규칙을 알아야 축구를 즐길 수 있듯, 언어의 규칙을 알아야 예술과 디자인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까요.

시각언어의 바탕은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색성향미촉(안이비설신)의 감각에 근거하죠. 경험을 담는 것을 그릇에 은유한다면, 이미지를 담는 것은 그림이고, 뜻을 담는 것은 글입니다. 그래서 그릇과 그림, 글이 시각언어의 바탕이 됩니다. 이 언어바탕이 언어놀이의 전반적인 규칙입니다. 미술가든 디자이너든 시인이든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모두 이 경험과 이미지, 뜻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그것'에 담습니다. 즉 '것'이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담을 수 없습니다. '것'이란 존재 또한 경험에 근거하죠. '노속치기'처럼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소통되지 못하고 금방 증발해 버립니다. 즉 경험이 없다는 거짓이 발견되는 순간 반칙으로 여겨져 퇴장되죠.  

앞서 추상적인 심벌의 시각언어를 갖고 인도의 차크라와 연결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연결은 거짓은 아닙니다. 인도에는 차크라의 전통이 있고, 그 차크라 구분에 맞게 추상적인 요소들을 배치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이 도식을 이야기하면 수긍하는 분위기입니다. 적어도 반칙으로 여겨지지는 않죠. 이렇듯 추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언어방법과 놀이는 반드시 언어바탕이라는 규칙에 근거해야 합니다. 여김 바탕치기가 노속치기가 되어서는 안되죠. 

우리의 생각이 자유롭듯 여김 바탕치기인 언어놀이는 자유롭습니다. 의미요소를 마음대로 분리하고 조합할 수 있죠. 20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대상을 해체하고 콜라주 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 자유로운 언어놀이에도 목적은 있습니다. 바로 언어바탕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죠. 축구나 야구의 경우 게임(놀이)가 축구나 야구의 규칙을 바꾸진 않습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규칙이 수정될 수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축구와 야구의 규칙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반면 언어놀이는 끊임없이 언어바탕=언어규칙을 바꿉니다. 비록 언어적 바탕을 근거로 하는 언어놀이지만 이 놀이가 언어적 바탕을 끊임없이 변화시킴으로서 놀이의 바탕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죠. 그래야 언어놀이가 빈약해지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이 말이 시각기호가 되면 '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교한 언어놀이로 만들어진 말과 글은 공공적이라 보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한자로 '의意'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법法'이라고 말하죠. 불교의 유식학에서 말하는 안이비설신 뒤에는 늘 '의'가 따라옵니다. 이를 풀어낸 '색성향미촉' 뒤에도 늘 '법'이 따라오죠. 한자에서 '법'은 일종의 규칙입니다. 이 규칙은 바로 '말/글'을 의미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느낌자질과 함께 생각에 의해 형성된 말과 글을 언어적 바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특징이죠. 그래서 사람은 다소 빈약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상위의 포식자가 되었죠. 공공적인 언어를 통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한 덕분입니다. 언어놀이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언어놀이로 언어적 바탕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집단성을 강화시키는 것이죠. 이 집단은 다시 더 풍성한 '언어놀이'의 바탕을 갖게 되겠죠. 

이렇게 언어바탕과 언어놀이는 선순환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배웁니다. 의미를 가진 말이 갖고 있기에  다름 동물과 달리 새김 바탕치기가 무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경험을 감각만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더불어 하게 되죠. 그래서 새김 바탕치기에 의식이 개입됩니다. 여김으로 형성된 말이 개입된 새김 바탕치기가 바로 우리가 보는 예술과 디자인입니다. 비록 감각을 기반으로 지각을 표현한 그림이지만 아주 정교한 의식을 거쳐 그려진 것들입니다. 자 그럼 이런 측면에서 예술과 디자인을 살펴보죠. 



(7)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

1) 현대미술

이제 수업 맨처음 언급한 미술사를 다시 돌아보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려보죠. 저는 사람을 대사과정에 기반해 감각과 지각, 생각으로 구분하고 감각은 모방을, 지각은 재현을, 생각은 편집을 한다고 말쓰드렸습니다. 이 기준으로 고전미술과 인상파미술, 포비즘과 큐비즘, 데스틸과 구성주의를 구분했습니다.

사람은 경험과 생각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기술이 없던 19세기 이전에는 소묘나 유화, 투시도법 등을 활용해 감각적 경험을 최대한 사실적 이미지로 모방했습니다. 중세나 이집트에선 선배들이 구축한 예술양식을 최대한 잘 모방해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고요. 15세기 얀 반 에이크 형제는 새로운 물감 기술을 일반화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미술가들은 달걀 노른자와 물감을 섞어 물로 희석하는 에그템페라 기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얀 반 에이크 형제는 물감을 기름에 섞여 사용하는 오일페인팅(유화) 기법을 사용합니다.  에그템페라는 기본적으로 수채화이기에 물감층이 불투명합니다. 반면 유화는 투명한 기름층 덕분에 물감층이 올라갈수록 풍부한 깊이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벽화를 그릴 경우 쉽게 마르지 않는 기름 덕분에 훨씬 구체적인 표현이 가능했죠.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마사초와 브루넬리스키 같은 예술가들이 투시도법을 발견합니다. 위 예시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마사초의 그림입니다. 일종의 3D페인팅이라 할 수 있죠. 이렇듯 중세와 르네상스의 탁월한 예술가와 장인들 모두 감각적 모방을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전주의 미술가들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19세기 사진이 발명되면서 감각적 모방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이를 의식한 일군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감각적 모방이 아니라 주관적인 지각을 재현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죠. 사진이 발명된 동시에 물감을 튜브에 담을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었습니다. 튜브 덕분에 물감을 쉽게 구할수 있었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쉽게 휴대할 수 있었기에 풍경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아카데미 출신의 예술가만이 아니라 선교사와 직장인 등 비전문가들도 맘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미술가들이 고흐와 고갱 그리고 세잔입니다. 후기 인상파로 불리는 이들은 미술의 양식을 새롭게 재편합니다. 고흐는 풍경에 마음을 담아 표현했고, 고갱은 본능을 표현합니다.

세잔은 다소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형태와 색을 분석해 추상적인 심벌화시켜 다시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 방식은 마티스와 피카소 같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티스는 색을 해체하고 다시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했습니다. 피카소는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티스의 방식은 포비즘, 피카소의 방식은 큐비즘이라 불립니다. 이들의 방식은 네덜란드와 러시아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몬드리안 등 네덜란드 데스틸(더스타일) 미술가들은 마티스보다 훨씬 과감하게 추상화시킵니다.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가들도 형태를 과감하게 추상화시킵니다. 거의 의미가 사라진 상태로 만들었죠. 빨강, 파랑, 노랑, 검정, 점, 선, 면 등 극단적으로 추상화된 요소들을 마음대로 조합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뒤샹과 같은 다다주의 미술가들은 양식을 넘어 회화와 조각 같은 기존 예술 형식 자체를 부정합니다.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에 낙서하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형식과 의미를 해체합니다. 그 정점이 된 사건이 뒤샹의 '샘(변기)'입니다. 그는 이를 레디메이드라 부르며 기존 조각 형식과 모방과 재현의 예술, 미술관이라는 시스템을 통채로 부정합니다. 나아가 예술가들이 판단하는 예술작품의 시스템조차 조롱하죠. 기존 예술의 의미를 통채로 부정한 것이죠. 이 시도는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습니다. 20세기 현대예술은 대부분 개념미술이었습니다. 내용보다는 형식이 계속 바뀌었기에 '형식주의'라고도 말합니다.

구성주의와 데스틸의 추상화 시도는 독일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줍니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모여 설립한 바이마르공화국 국립 바우하우스는 공예교육과 미술교육을 통합했습니다. 해체와 콜라주의 방식을 활용해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보편양식을 만들고자 합니다. 공예를 중시한 이들 또한 소묘중심의 회화와 조각이 아닌 타이포그래피와 텍스타일, 설치미술, 사진 등의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접목을 시도합니다. 이런 시도들을 종합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건축양식 만들고, 이를 배우는 사람들은 건축적인 태도를 갖도록 했습니다.  

바우하우스 교사인 칸딘스키와 그래픽공방에서는 추상화된 요소들을 가지고 음악의 음표와 같은 미술의 문자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른 한편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는 노동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자형식을 시도합니다. 바로 아이소타입입니다. 그는 그래픽 미술가 게른츠 아르트와 협업해 다양한 그림기호들을 만듭니다. 노이라트는 이를 '아이소타입'이라 불렀습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아이콘과 픽토그램, 이모티콘은 모두 이 아이소타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실상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문자죠. 이는 초기 표의문자처럼 소리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표현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편양식들은 대량으로 유통되고 소통될 수 있었습니다. 대량생산으로 대변되는 당시 산업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죠.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디자인이란 용어가 부각되면서 바우하우스 출신 미술가들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술가들이 산업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산업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형성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디자인의 역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추상적 심벌에서부터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은 사실상 같은 바탕을 갖고 있습니다. 감각을 모방하고 지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화했죠. 대상을 극도로 추상화시키면서 생각을 편집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데카르트가 시도한 분해와 조립이 미술가들에게 해체와 콜라주로 환생한 것이죠. 이 시도에서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은 갈라집니다. 반드시 이 점을 알아야 현대 미술과 현대디자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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