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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평어(平語)' 실험

by 윤여경

한국말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 경어와 반말이다. 서로를 존경하면 경어를 쓴다. 경어를 쓰는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조심하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말을 삼가하기에 긴밀한 소통을 하긴 어렵다. 또한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기에 집단화 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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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서로 반말하는 사이는 아주 긴밀하다. 반말은 친근한 말과 막말을 넘나든다. 서로에 대한 수용폭이 아주 크기 때문에 관계가 긴밀해진다. 긴밀함은 '친밀'과 '적대' 두가지가 있다. 친밀하면 내부적으로 끈끈해지고, 막말하면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긴밀함의 공통적인 특징은 관계된 자신들 외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듯이, 서로 막말하며 싸우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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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삼가하는 '경어'와 서로 밀접한 '반말'로는 건전한 집단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거나 집단에 종속되거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서양과 중국에서 말하는 '우정 관계' '대화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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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이 우정과 대화 관계가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 원인이 말의 형식에 있었다는 것은 최봉영+이성민 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일찍부터 이 주제를 탐구하던 이성민 샘은 오래전부터 새로운 말 형식인 '평어'를 통해 관계 실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디자인아카데미아에서 그 실험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현재 1-3기 상당수가 서로 평어를 쓰고 있다. 이 실험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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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샘은 내가 이 실험에 동참하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실험의 관찰자로서 실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아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으며 실험 참여자들 못지 않게 실험의 성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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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로서 이 실험의 성공여부는 끈끈함의 정도에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평어를 쓰는 사람들이 너무 끈끈한 관계로 묶이면 평어가 반말로 퇴색될 것이고, 너무 멀어지면 평어는 경어로 어색해질 것이다. 평어 관계의 끈끈함은 어느 정도의 점도가 적절할까? 지금이 적절한 점도라면 이 점도가 계속 유지될까? 어떻게 하면 점도를 계속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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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어가 흩어지는 기체이고, 반말이 얼어 붙은 얼음이라면, 평어는 액체인 물이다. 즉 평어의 신선한 점도란 기체나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썪거나 언젠가 증발된다. 그래서 이 평어 실험은 멈출 수 없다. 멈추면 관계가 고이게 되니까. 나는 이 평어 실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인문학 실험이란 이런 것이구나...한번 시작하면 멈출수 없는 것. 멈춘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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