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아카데미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개 꼽으라면 '커리큘럼'과 '커뮤니티'이다. 커리큘럼은 디자인 공부를 위한 초석으로 전적으로 선생님의 역할에 달려 있다. 커뮤니티는 디자인 공부를 전진시키고,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전적으로 학생들간의 관계에 달려 있다. 디자인아카데미는 비록 1년 과정이지만 '커리큘럼'보다 '커뮤니티'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 수업만이 아니라 엠티, 파티, 동아리, 스터디 등 학생들 사이에 교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수업은 선생님에게 달려있다. 학교는 선생님이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면 된다. 이 외에 학교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반면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 적절한 때에 적절한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야만 한다. 어쩌면 진정한 학교의 역할은 커리큘럼보다는 커뮤니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디자인아카데미의 선생이자 운영자로 참여한다. 내 수업은 주로 강의로 이루어지기에 학생들은 맑은 정신과 공부 의지만 있으면 된다. 학생들이 여유가 있는 만큼 선생의 할 일이 늘어난다. 좋은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이것저것 고려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선생의 입장은 운영자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다. 자신이 맡은 수업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운영자는 선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선생이 수업을 디자인한다면 운영자는 학교를 디자인해야 한다. 선생이 전경이라면 운영자는 배경이다. 배경은 눈에 띄면 안된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신중하게 계획하고, 실천을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전경들이 신경쓰지 않고 편안하게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디자인아카데미의 시그니처 중 하나가 '평어'이다. '평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언어로 디자인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이성민 선생님이 디자인하셨다. 현대철학을 주로 번역하셨던 선생님은 한국사람들 사이에 '우정'과 '대화'가 부족한 이유를 깊고 넓게 묻고 따져오셨다. 그러다 최봉영 샘의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읽고 그 원인이 '존비어체계' 즉 존댓말과 반말의 언어적 관계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언어체계를 폐기하고 새로운 언어체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그 언어체계가 바로 '평어'다.
최봉영 선생님이 지적한 한국말의 문제는 '존댓말'과 '반말'의 관계다. 한쪽이 존댓말을 하고, 다른 한쪽이 반말을 하면 사람관계에 높낮이가 생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높은 사람은 편하고, 낮은 사람은 불편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대화하기가 어렵고 우정은 커녕 인정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최봉영 선생님은 '존댓말'과 '반말'의 관계가 아닌 존댓말'만' 혹은 반말'만' 쓸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존댓말'만' 쓰면 좋겠다고 강조하신다.
영어번역자인 이성민 선생님은 '존댓말' 관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상호 존댓말을 하면 관계가 서먹하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이 관계 또한 서로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반말'관계가 대화가 편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존댓말보단 반말'만' 쓰는 관계가 낫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을 밀고 가기 위해서는 가시밭 길이 많았다. '반말'은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말'은 친근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서로 적대적으로 흐를 가능성도 높다. 사람들은 사이가 틀어지면 바로 반말을 시작한다. "뭐 이 XX야!"하면서. 반말에는 욕설이 많이 섞여 있다. 그래서 언듯 들으면 친근과 적대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뭐 이 XX야!"라는 말을 통해 서로의 친근함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성민 선생님은 이런 경우들을 모두 고려해서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 새로운 언어를 디자인해야 겠다고 결심하셨다. 이를 위해 영어식 호칭을 끌어왔다. "여경아 밥 먹어"라고 말하면 반말이다. "여경, 밥 먹어"라고 말하면 반말이지만 묘하게 느낌이 다르다. 앞의 말은 '아'가 붙어 친근해 보인다. 그 탓에 "여경아 밥 쳐먹어"라고 막말을 해도 무방하다. 반면 뒤의 말은 "여경, 밥 쳐먹어"라고 말하면 뭔가 어색해진다. 왜 그럴까? 한국말의 익숙한 호칭이 사라진 탓일까? 어쩌면 여기에 새로운 핵심 포인트가 있다. 익숙함이 새로움의 방해가 되기에 일부어 어색한 표현을 씀으로서 새로운 언어를 디자인 하기 편해지니까. 사실 이런 접근은 디자이너들이 종종 쓰는 방법론이다.
나는 선생님이 디자인한 말을 들으며 '수평관계'가 떠올랐다. 선생님이 디자인한 언어를 '반말'이 아니라 '평어'라 불렀다.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다. 나는 선생님이 디자인한 이 언어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면서 '평어'라는 말을 썼고, 어느새 학생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이성민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평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이 표현을 다른 사람들이나 책에서도 발견하셨다고 한다.
디자인아카데미 커뮤니티가 급격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평어' 덕분이다. 이성민 선생님은 디자인아카데미에서 수업을 하면서 '평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평어'에 크게 동조하고 있던 나 또한 그 도입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때론 내 수업에서 '평어'를 사용했다. 학생들은 평어를 쓰면서 급격히 가까워졌고 어느새 대부분의 학생들이 평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평어로 소통하는 커뮤니티는 다른 일반적인 사회 관계와 다르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편안하면서도 든든한... 마치 종교와 같은 숭고가 느껴지는... 이런 것이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우정'인가 싶을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고, 아렌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그 '우정' 말이다.
한 학생은 입학설명회에 참여하면서 "이 집단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학교를 소개한 친구도 함께 입학설명회를 듣고 이들이 뭔가 짜고 사기를 치는듯 싶다며 입학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친구의 조언을 져버리고 과감하게 입학을 시도한 그 학생은 자신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제 이해가 되며, 다음 입학설명회때 자신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학교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이 입학할때 비슷한 우려를 하면서도 결국 그렇게 행동해요.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그 학생은 유학경험이 풍부해 이미 서양말에 익숙하다. 어쩌면 한국에서 잃어버렸던 그 경험을 되찾았다고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바로 평어경험일 것이다. 그 학생은 유학시절 서양말 평어를 통해 다른 나라 많은 사람들과 우정관계를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와서는 강력한 존비어체계에 막혀 그 우정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우정을 디자인아카데미에서 다시 되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디자인아카데미에서 '평어'관계를 주도했던 학생들조차 대체로 이 관계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 왜냐면 한국에서는 도무지 경험하지 못했던 관계이기 때문이다. 평어는 존댓말처럼 서로를 존중하면서 친근하고, 반말처럼 친근하면서 적대적이지 않다. 이 묘한 공존이 뭔가 어색함을 준다. 그래서 초기에 몇몇 학생들은 평어에 동참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거북해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차츰차츰 평어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평어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의 맛을 본 이상, 그 맛을 잊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들이 몇년간 더 지속되면 이들은 이 언어 관계를 표현할 '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이상한 집단'처럼 보이진 않겠지.
이 행복한 실천적 경험속에서 이성민 선생님의 작은 불만이 하나 있다. 평어를 잘 이해하고 주장하는 여경 샘이 정작 평어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이유를 선생님께 설명할 기회가 마땅히 없었다. 사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평어로 인한 우정관계만큼 존댓말로 인한 존중의 관계, 반말로 인한 친근한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존댓말의 어색함과 반말의 적대조차 앞의 긍정적 관계만큼 소중하게 생각한다. 때론 편안함보다 복잡함이 중요할 때가 있다. 특히 학교에서 선생과 운영자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기에 또한 학교에 함께하는 선생, 학생들과 학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얽혀 있기에 더욱 그렇다. 맥락이 복잡하다 보니 언어도 관계도 복잡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선뜻 평어 세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 또한 이성민 선생님만큼이나 답답했다. 그래서 내가 평어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심해왔다. 그러다 아주 최근 그 방법을 찾았다. 요즘 유행하는 '부캐'를 통해. 과거 일부 시민단체 사람들은 수평관계를 유지하지 위해 별칭을 부르곤 했다. 호칭은 별칭으로 하고 말은 존비어체계를 유지했다. 나는 이때도 별칭에 동참하지 않았다. 아예 별칭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사실 별칭은 일종의 부캐다. 본캐로 어색한 관계를 부캐로 풀어내기 위해 별칭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별칭을 써도 수평한 관계를 만들어가긴 어려웠다. 그 원인이 '존비어체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하지만 이미 '평어'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별칭인 부캐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과거 시민단체가 수평관계를 위해 별칭을 썼다면, 나는 이미 수평한 관계에 동참하기 위해 별칭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이지원 선생이 유튜브 방송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최근 평어에 동참한 지원은 이 방송의 모든 언어는 '평어'로 하면 어떻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크게 반기며 언젠가 최봉영 샘을 초대하자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이제 평어에서 도망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평어에 동참할까 고심하다가 '부캐'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원과 나는 이미 거의 평어와 비슷한 말을 써왔고 평어에 의한 우정 관계에 가깝지만, 지원이 나를 오랜시간 '형'이란 호칭을 써왔기에 엄밀히 말해 반말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원에게 나의 부캐인 '쥰'을 소개하고 방송은 '쥰'으로서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이름은 '윤여경'이다. 사람들은 나의 이름인 '여경'에 나의 역할을 붙혀 부른다. 여경씨, 여경님, 여경샘, 여경디자이너님, 여경작가님 등등. 이렇게 불리면 나 또한 상대를 존중해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상호 존댓말 관계가 된다. 지금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상호 존댓말을 쓰고 있으며 반말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상호 반말은 주로 고등학교 혹은 대학친구를 만날때 쓴다. 반말로 말하면 친근함과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 그래서 상대를 더 애뜻하게 챙기게 된다. 대학친구들은 나를 '윤'이라 부른다. 서로 나이차이가 나더라도 '형'이란 말보다 '윤'이란 말을 선호한다. 그래야 더 친근하게 욕설섞인 반말이 가능하니까. 가끔 대화가 진지하게 흐르면 '형'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반말 친구들은 서로 개의치 않고, 서로를 막 부르고, 막 말한다. 존댓말도 장점이 있지만, 반말관계에서 오는 편안함도 있다.
내 경우 '여경'은 주로 존댓말 관계에 쓰이는 호칭이고, '윤'은 주로 반말관계에 쓰이는 호칭이기에 나의 부캐로 두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야 했다. '쥰'은 '윤'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뭔가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쥰'을 지원에게 주고, 나는 재미를 위해 '균'으로 할까 생각했는데... '균'은 스스로를 너무 자학하는거 같아서 '평어'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중에 오로지 반말만 쓰는 부부캐가 필요하게 되면 그때 '균'을 쓰기로 하고, 부캐 이름을 '쥰'으로 결정했다. 지원의 부캐는 자기가 알아서 잘 잡을 것이다. 늘 그랬듯.
지난 주 첫 방송에서 '쥰'으로 데뷔했다. 나의 새로운 정체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각언어 수업 종강파티에 '여경샘'이 아닌 '쥰'으로 참석했다. 평어로 대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재혁샘과 의래샘에 강제로 부캐를 강요했고 재혁샘은 '제이', 의래샘은 '킴'이 되었다. 나만큼이나 어색한 이름이었지만 사람들은 금방 적응했다. 부캐로서 선생님들도 평어에 동참할 방법을 찾은만큼 앞으로 디자인아카데미의 평어는 더욱 확장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평어를 위한 이 부캐가 언젠가 새로운 본캐로 거듭날 것이라 기대한다.
'언어, 말, 글'은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언어를 그릇에 비유하면, 언어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담아 전달하는 소통매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뜻을 소리와 문자에 담아 전달하듯이,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사람도 자신의 뜻을 소리와 문자에 담아 가져간다. 물은 담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이 뜻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언어는 담는 사람과 경험하는 사람의 뜻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말과 글은 서로 오해를 낳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닌데 상대방은 내 말뜻과 전혀 다른 뜻으로 내 말을 오해한다. 글은 말보다 더욱 심하다. 하지만 때론 이 오해를 새로운 생각을 낳기도 한다. 아니 이 오해 때문에 언어에 동참하는 각자가 자신만의 '자아' 혹은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의 이런 특징을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상대방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 질문은 이미 '나'와 '너'가 같은 경험을 다르게 느낀다는 점을 전제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말의 형식에 따라 달라진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니 생각은 뭐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뭐라고 말 좀 해봐!" 등등 질문의 의도는 같지만 관계에 따라 말의 형식이 달라짐으로서 상대방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진다. 아마 위 경우 모두 대답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어떤 질문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겠지만, 어떤 질문에는 침묵할 것이고, 어떤 질문에는 반발할 것이다. 말이란 아니 언어란 그런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의도는 좋지만 말이 낳은 폐혜로 만들어진다. 사람들인 언어와 관계의 특징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언어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엉뚱한 처방을 내놓는다. 가장 간편한 처방이 바로 '억압'과 '차별'이다. "너는 왜 그정도밖에 못해?" "다른 애들은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애고 어른이고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비판, 비평, 비난이 사람들을 깨닫게 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극단적인 상황에선 이런 접근이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의도와 거꾸로 갈 가능성이 높다. 펜트하우스의 하은별처럼.
최근 예능프로에서 '부캐'가 유행한다. 이들의 부캐는 정체되고 고착된 캐릭터,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기 위한 노력이다. 부캐의 성공은 오히려 본캐를 새롭게 조명하고 새로운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 나는 이런 노력이 예능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간의 대화가 막히고 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부캐와 평어는 대화의 물꼬를 터주고 새로운 우정 관계를 싹띄울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