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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디자이너 관점에서 본 설민석 논란

by 윤여경

나는 몇권의 책을 썼고, 몇권의 책을 디자인했다. 운좋게도 두가지 경험을 모두 해봐서 책을 쓸 때와 책을 디자인할 때 생각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다. 타이포그래퍼이면서 저술가인 헤라르트 윙어르는 글자를 읽을 때는 글자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고, 글자의 형태에 집중하면 글자가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책을 쓸때와 디자인할때도 이와 비슷하다. 책의 내용과 형식이 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책을 쓸때는 책 디자인에 그다지 신경쓰지 못하고, 책을 디자인할때는 책 내용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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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설민석이 논란이다. 과거 최진기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분야와 경우는 좀 다르지만 김어준, 손석희도 비슷하다. 이들의 비슷한 점은 전문가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진짜 연구자, 학자들은 설민석과 최진기와 같은 강사가 불편하고, 진짜 기자들은 김어준과 손석희 같은 앵커들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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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논란을 볼때마다 다소 안타깝다. 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보지 않을까... 서로 다른 역할이 있고, 그 다른 역할에서 교훈을 얻기 보다는 그 역할을 불편하게만 바라볼까... 이런 논란이 있을때마다 느끼는 점은 이 사회에 다양성에 대한 인식, '차별'과 '구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빈약한지 다시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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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민석과 최진기, 김어준과 손석희를 볼땐 '전문가'가 아닌 '전달자'로서 그들의 탁월성에 탄복하곤 한다. 나는 디자이너인데 왜 저들만큼 잘 전달하지 못할까 자신을 질책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어떻게 내용을 구성하고, 어떤 방식으로 청자와 독자에게 전달하는지 그 비법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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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고, 글을 읽을때 '전달자'가 아닌 '전문가'로서 그들의 탁월성에 탄복하곤 한다. 나는 그들이 이론을 어떻게 접근했고 또 스스로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겸허히 배우려 노력한다. 왜냐면 나는 디자인 이론가로서 디자인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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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선생님은 <한국사회의 억압과 차별>에서 '차별'과 '구별'을 구분한다. '차별'은 크기가 다른 것이고, '구별'은 본질이 다른 것이다. 전문가로서 서로의 학문을 견주는 것은 '차별'로서 접근해야 한다. 전달자로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잘 전달하고 어떤 사람은 잘 전달하지 못한다. 새뮤엘 노아 크레이머는 수메르 쐐기문자의 세계 최고 권위자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의 책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는 참 읽기 어렵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저자가 글을 잘 쓰지 못하는듯 싶다. 오죽했으면 번역자도 크레이머의 글쓰기에 큰 불만이 있음을 저자후기에 밝힐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권위와 능력, 전문성이 폄하되는 건 아니다. 전문성과 전달성은 별개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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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전달자는 '차별'이 아니다. '구별'인 경우다. 둘은 본질적으로 역할이 다르다. 물론 가끔 전달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전문성으로 포장할때가 있다. 그럴땐 살짝 불편하지만 크게 문제될거라 보진 않는다. 전문성을 갖춘듯 보여야 전달력이 높아지고... 이 또한 하나의 기법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서 노벨상을 받거나, 이달의 기자상이나 풀리처상을 받을리 없다. 그들 또한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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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쓸때 나는 전문성에 많이 공을 들인다. 그래서 내 책을 읽는 분들은 불만이 많다. 너무 어렵다고... ㅠㅠ 전문성에 치중하다보니 내용을 압축하고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어려워진다. 게다가 내가 다루는 분야는 정답이 없기에 더욱 말과 글을 배배 꼬게 된다. 나는 전문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문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함정은 너무 깊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깊이를 포기할 수도 없고...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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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디자인할때는 나는 전달성에 공을 많이 들인다. 그래서 책의 전체가 아닌 책의 일부만 확대 과장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옛날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표지나 비코의 <새로운 학문>의 속지처럼 책의 전체 내용을 다 담으려 하면, 클라이언트는 분명 퇴짜를 놓을 것이다. "선생님 이렇게 디자인하시면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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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동시에 두가지 역할을 하기 어렵다. 전문 디자이너의 경우 한쪽은 디자인을 엄청 잘하는데 설명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고. 디자인은 잘 못하지만 설명을 잘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둘 모두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질투심이 끌어올라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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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이쪽과 저쪽, 요쪽과 그쪽 등 다양한 쪽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서로의 능력과 역할이 다르며, 부족한 점은 서로에게 배우면 된다. 최근 나도 어떤 전문가에게 비판을 받았다. 전문가의 지적은 그 자체로 겸허히 수용하면 된다. 나는 그 전문가만이 아니라 설민석 샘과 같은 사람에게도 많이 배운다. 나도 저 사람처럼 내용을 잘 전달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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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본질이 다르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나는 전문가로서는 전문가는 간혹 비판하지만, 전달자에 대해서는 비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과거 어떤 분이 공적인 매체에 쓴 글에 사실 관계가 다른 내용이 있었다. 잘 쓴 글이고, 전체 내용에 크게 지장을 주는 상황이 아니라 고민고민을 하다가 페메로 내용을 바로 잡아 드렸다. 여기저기 글을 많이 쓰시는 분이라 혹시 비난의 빌미가 될지도 모를까봐 걱정되서 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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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전문가와 전달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도 있고 기획자도 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왕은 언제나 왕이고, 신하는 언제나 신하란 말(군군신신)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조언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은 때론 아버지일수도 있고, 떄론 자식일수도 있으니까(부부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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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함께 살아간다. 나는 공자의 조언처럼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역할이 선을 넘을 때도 있다. 그럴때 정중히 지적해야 마땅하다. 지난번 최진기 논란, 설민석 논란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번 사태로 이분들이 좌절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금 인식하고 재도약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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