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시도해본다. 오늘 최봉영 샘과 말에 있어 존재와 현상, 인식에 대해 긴 통화를 했다. '존재'가 '현상'으로서 드러나는 것이 '인식'이기에 중요한 논점은 '존재'와 '인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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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한국말에 있어 '것'과 '일' 중 어떤 것이 존재로서 선행되는지를 다시 여쭈었다. 왜냐면 선생님은 '것'이 '일'에 선행된다고 말하셨는데, 나는 '일'이 있고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것'은 '겉-긋-그'로 '일-있-이'라는 경험적 배경이 있어야 하기에 인식에 있어 '일'이 '것'에 선행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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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것'이 왜 '일'에 선행되는지 한참을 설명하셨다. 처음엔 선생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양말과 한국말의 차이, 즉 '쪽'을 구분하는 한국말의 특징으로 설명하실때 비로소 선생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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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말은 '주어+동사+목적어'으로 구성된다. '주어+동사'가 나오고 뒤에 '목적어' 등이 나열되기에 '쪽'이 일방적이거나 모호하다. 말의 구조 자체가 어느 한쪽으로 확 기운 상태로 말해진다. 반면 한국말은 '주어+목적어+동사'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주어=이쪽'과 '목적어=저쪽'이 확실히 구분된다. '주어'와 '목적어'가 각각 하나의 쪽으로서 자리하고 있고 그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또렸한 '쪽'들이 상호적으로 작동해 일로서 드러난다. 이때 '쪽들=것'은 존재이고, '일이 드러남'은 현상이고, 사람은 '것'과 '일'로서 세상을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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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구조의 차이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와 '인식'에 크게 영향을 준다. 서양철학에서 '존재'는 주로 '동사' 특히 'be동사'로 말해진다. 영어로 존재는 being이나 existence라 말하는데, being은 주어라는 존재를 뒷받침하는 말이고, existence는 ex+is+tence로 어떤 존재가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듯 싶다. 한국말로 치면 '겉=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샤르트르는 존재를 '있음과 없음'으로 살폈고, 하이데거는 존재를 '동사적 흐름=시간'으로서 살핀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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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말과 달리 한국말에서 존재는 '것'과 '일'이다. 동사로서의 '일'만이 아니라 '것'이라는 일반명사적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문장의 구조가 '주어+목적어+동사'이기에 '주어=이쪽=이것'과 '목적어=저쪽=저것'이 서로 상호작용해 '일=동사'로서 드러나기 떄문이다. 한국말은 서양말에서 한쪽의 존재가 주어지고 뒤에서 이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해지는 것과 달리 양쪽의 존재들이 먼저 쪽들로서 주어지고 이를 함께 풀어내는 방식으로 말해진다. 즉 서양말이 하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해진다면, 한국말은 존재가 또렸하게 드러난 상태에서 이 존재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말해진다. 이렇듯 한국말은 존재가 인식에 선행되기에 '존재성'이 아주 강조된 말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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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말은 '주어=한쪽'의 존재를 일로서 규명하는 방식으로 말해지기에 '은유=여김=메타포'가 아주 중요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말이 '은유=여김'으로 말해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사실은 레이코프와 존슨의 책을 살피면 된다. 그래서 서양말에서 존재는 각각의 낱말을 은유로서 살피는 개념철학이 발달했고 Be동사로 살피는 있음과 없음의 문제 혹은 행위와 상태의 문제로 여겨진듯 싶다. 이것은 존재론임과 동시에 인식론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서양말은 구조상 서양의 존재론과 인식론은 동시에 말해질 수 없다.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처럼. 혹은 물리학에서 입자냐 파동이냐를 따지는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존재냐 인식이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 말해야 한다. 그래서 서양말로는 양자역학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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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말은 '쪽' 구분이 확실하기에 존재가 인식에 선행되어 말해진다. 물론 한국말에도 다양한 '은유=여김=메타포'가 있다. 한국말의 '은유=여김'이 서양말과 다른 점은 '은유=여김'이 존재와 인식을 모두 포괄하지 않고, 존재는 그대로 둔채 오로지 인식적 문제만으로 따로 떼어 살필 수 있다. 가령 '인생은 마라톤이다'의 경우 '인생'을 '마라톤'에 은유하는 존재=인식 방식이라면, '나는 친구와 함께 마라톤을 뛴다'의 경우, '나'라는 쪽, '친구'라는 쪽이 모두 선행되고, 이 쪽들이 함께 상호작용해 '마라톤을 뛴다'라는 인식적 여김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첫번째 문장은 영어처럼 존재=인식이 동시에 작동한 반면, 두번째 문장은 존재와 인식이 따로 작동한다. 최봉영 샘이 예시로 들었듯 한국말은 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입자이면서 파동이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입자'라는 쪽과 '파동'이라는 쪽의 존재를 '면서'로서 동시에 드러낼 수 있기에 양자역할의 원리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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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말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한국말은 존재와 인식을 함께 설명함에 있어 확실히 유리하다. 그 이유는 '것'이란 말 때문이고, '것'이란 말이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은 '쪽' 개념 덕분이다. 한국말은 '쪽과 쪽'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낱낱의 '것=존재'를 또렸하게 말할 수 있고, 동시에 '있음-없음' '이다-아니다' '같다-다르다'처럼 인식을 또렸하게 말할 수 있다. 반면 서양말은 동사가 주어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뒷받침하기에 존재와 인식을 확고하게 구별해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존재론을 말할때는 보편이냐 개별이냐 '존재'만을 논하고, 인식론을 말할때는 경험이냐 선험이냐는 인식만을 논해야 한다. 나는 서양사람들이 존재를 말할때 be동사에 집착한 것은 말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접근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 속에서 존재를 확고히 받쳐주는 것은 그 말(동사)밖에 없으니까. 이런점에서 레이코프가 말에 있어 존재와 인식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이 둘을 묶어 '은유'라고 통찰할 것은 정말이지 탁월한 접근이란 생각이다. 물론 '은유'는 경험적 인식에 많이 기운 태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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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깨달음, 앞서 쓴 내용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최봉영 샘의 글을 읽고 또 읽고, 설명을 듣고 또 듣고,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서 이른 것이다. 나는 디자인이론을 만들기 위해 존재와 인식적 문제에 상당히 천착해 왔다. 처음엔 고대그리스와 중세철학을 읽으며 어설프게나마 보편개념과 존재론에 관심을 두었다. 르네상스를 지나며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 존재론을 대체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존재론을 뒤로 하고 인식론에 빠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식'에 집중했고, 때론 존재조차 인식적 문제로 판단해 왔다. 그러다가 '은유'를 알게 되면서 이 태도에 확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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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한국말'을 공부하면서 나의 말과 생각을 메타적 현상으로 살피고 있다. 나는 '존재'와 '인식'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에 '인식'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들을 접하면서 그것이 곧 '존재'이려거니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다소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면 '생태'과 '타인' 즉 환경문제와 사회문제에 있어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인식=존재'라는 개념은 무척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 가지곤 환경과 사회문제의 해결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존재'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항상 웅크리고 있었고, '인식'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언젠가 반드시 '존재' 문제를 따로 살피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를 '역사'로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연결시켰던 것처럼. 하지만 이 태도는 서양말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생각의 한계가 내 마음속에 내면화 된 것이다. 하긴 헤겔 또한 철학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역사를 살피지 않았던가... 결국 내 생각 또한 그 나물의 그 밥, 헤겔 따라하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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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선생님 덕분에 존재에 대해 크게 한발 다가선 느낌이다. 한국말의 쪽사상에서 존재론을 재발견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아직은 어설프게 정리된 상태이기에 아직 확실하게 내것이 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앞으로 몇년을 계속 곱씹고 곱씹을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