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영 샘 덕분에 한국말에서 존재와 인식이 어느정도 정리된듯 싶다. 이 글의 제목에 한국말의 존재와 인식이 모두 담겨 있다. 한국말 존재의 가장 큰 바탕은 '쪽'이다. '쪽'은 일종의 자리 개념이다. 마치 '0'이 숫자가 들어갈 자리 개념인것처럼. '0'이란 자리에 '1'이나 '3'과 같은 숫자가 들어설 수 있듯이 '쪽'이란 자리에 '것'이 들어설 수 있다. '00'은 두개의 자리, '000'은 세개의 자리이듯이 '쪽'도 다양한 자리가 있다. 이쪽, 저쪽, 그쪽, 요쪽 등등. 다양한 쪽의 자리 각각에 '것'들이 들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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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경우 동사를 사이에 두고 '주부' 쪽과 '술부' 쪽이 구분되는데, 영어는 주어의 능동성이 강조된 말이라 주어쪽에 힘이 많이 실린다. 반면 한국말은 동사가 맨뒤에 나와 주부와 술부가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이쪽 저쪽에 공평하게 힘이 실린다. 가령 "나는 학교에 간다"라는 말을 "학교에 나는 간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간다 학교에 나는"이라 말해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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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어와 달리 '한국말은 다양한 쪽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말해진다.' 이 다양한 쪽들 위에 '것'이 있으니, "한국말은 다양한 것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말해진다"고 쪽과 것을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이 '것'이란 말이 바로 한국말에서 존재 그 자체이다. 한국말은 모든 존재를 '것'으로 여기기에 "거시기 그 거시기가 바로 거시기인 것이여"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각각의 '쪽' 자리에 '것'이 들어갈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말은 존재적 인식이 아주 또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은 말을 할 때 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려 한다. 존재가 불분명하면 인식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독특하게도 끊임없이 '한국적인 것'을 묻고 따진다. '한국'이라는 존재, '한국적'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알아야 비로소 '세계 속 한국'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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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에서 '쪽'이 자리이고, '것'이 존재라면, 인식은 '이'라는 말에서 비롯된다. 한국말은 '것' 존재를 인식할때 '이'라고 말한다. 가령 "이것은 책이다"라는 말은 '것'이란 존재를 '책'으로 여겨 '이다'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안이다)"는 '것'이란 존재를 '책'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내가 직접 본 '이것'이 내 머리 속 '그것=책'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것은 책이 안이다'라는 말은 '내 머리 안에 있는 책(그것)이란 관념과 내 앞에 보이는 이것이라는 현상적 존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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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국말은 어떤 존재(것)를 '이다' 혹은 '안이다'로 구분해 내 머리속 안과 밖을 구분해 현상적 존재인 '이것'과 관념적 존재인 '책(그것)'의 일치 여부를 구분해 인식한다. 그래서 '이다/안이다'는 한국말의 존재인식에 가장 기본 바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지/안이지'이다. 말을 할때 '이다/안이다'처럼 말의 말미에 쓰인 '다'란 표현은 군대 외에는 거의 안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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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한국말에서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쪽'이고 가장 근본적인 존재는 '것'이고, 가장 근본적인 인식은 '이'이다. 앞서 말했듯 '이'라는 인식은 '이다/안이다'로서 나의 관념(안)과 현상(이)의 일치여부는 따지는 판단형식으로 말해진다. 달리 말하면 한국말은 '쪽'의 태도로 '것'이란 존재를 '이다'인지 '안이다'인지 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인식으로 구성된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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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쪽, 것,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생각으로 바꾸고, 생각을 기반으로 경험의 가치판단을 내린다. 이 가치판단은 '갖음/같음'으로 일어나는데, 이와 관련된 글은 최봉영 샘이 준비하고 계신다. 이 '갖음/같음'이 영어의 논리, 소위 '메타포=은유'라 말해지는 말형식과 유사하다. 서양언어학에선 이 '메타포=은유'가 아주 중요한 키워드인데, 은유언어학, 신경언어학자들은 '은유'가 말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국말로 '은유'는 '녀김(여김)'이라고 할수 있는데, '넋'이란 말도 이 '녀김'과 관련이 있다. 나아가 '넋/녀김'은 '너'라는 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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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주부를 술부로 여기는 형식으로 말해진다. 그래서 주부의 존재와 술부의 인식 구분이 모호하다. 특히 주체인 주부와 구분된 객체인 술부를 존재로 볼 것인지, 인식으로 볼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서양철학과 언어학은 술부를 때론 존재로 때론 인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서양말 자체가 '주부=술부'이고 '='이 동사로서 '여김=은유'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어에서 'be동사'는 존재임과 동시에 인식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술부를 이끄는 동사의 인식적 행위가 있어야만 비로소 주부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의 구조를 가진 서양사람들은 '영국적'이나 '독일적'이란 정체성을 묻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려 한다. 인식과 의지적 행위로 존재를 바꾸려는 태도랄까. 그래서 다소 일방적이고 다소 폭력적이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하는 이런 태도는 중국사람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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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에는 중심와 주변의 인식 구분이 모호하고 이쪽 저쪽의 존재 구분이 또렷하다. 한국말은 '쪽-것'이란 존재가 이미 있다고 전제한다. 주부와 술부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먼저 각각의 존재를 나열한 다음 이 존재들을 한꺼번에 풀어낸다. 그래서 인식을 의미하는 동사가 맨 뒤에 위치한다. 즉 영어는 인식을 바탕으로 존재가 있다면, 한국말은 존재를 바탕으로 인식이 일어난다. 그래서 한국말은 먼저 이쪽 저쪽에 있는 것들의 눈치를 살피고 난 뒤에 인식적 결론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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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한국말에 한국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한국말을 알면 한국역사, 한국문화, 한국문명, 한국사회의 바탕과 현상을 이해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한국말이 한국사람과 한국적인 것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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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 나의 공부 갈무리이자, 2021년을 여는 글이다.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왠지 아주 중요한 논문을 한편 쓴 느낌이다. 아무튼 이 글로서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최봉영 샘과 묻따풀학당 친구들에게 새해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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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덧) 존재와 인식에 대해 쓰고 나니 '개인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인식에 기반한 존재'라는 서양말의 특징에서 결국 존재의 최소 단위는 인식적 주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인식하는 주체인 '개인'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구나.... 인식=존재에 있어 더이상 나눌수 없는 개인을 보편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