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최봉영 샘께서 '말'에 대해 아주 중요한 글을 한편 쓰셨다. 그 글은 '한국말'만이 아니라 모든 '말'에 있어 큰 선물이란 생각이다. 또한 말의 근본적 바탕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살필 수 있는 적절한 분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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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최봉영 샘이 쓰신 글은 '말'의 연구 방식이다. 선생님은 말을 소리와 뜻으로 분류한다. 사람은 말소리를 통해 말을 배운다. 이 말소리가 머리속에 차려져 말뜻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뜻으로 바꾸고 말소리로서 소통된다. 그래서 말을 연구하려면 '소리'과 '뜻' 크게 두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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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말소리차림'을 연구했다. 한국사람들을 말소리를 잘 살펴 '한글'이라는 문자를 만들었다. 최봉영 샘은 '말뜻차림'을 연구하고 계신다. 한국사람들으리 말뜻을 잘 살펴 '말뜻차림법' 즉 한국말 말법(문법)을 만들고 있다. 나는 이 과정에 크게 공감하여 선생님의 연구를 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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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디자인 이론을 만드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말이 아니라 주로 그래픽이미지로 소통한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 '기호 만들기'이자 '소통하기'이다. 때문에 디자인은 시각적인 그래픽이미지만이 아니라 소리, 맛, 냄새 등 여러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디자인은 시각디자인, 건축디자인, 패션디자인, 자동차디자인 등 '디자인'이란 말 앞에 주로 감각이나 매체를 의미하는 말이 붙어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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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이론가로서 최봉영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 이성민 선생님을 통해 '은유언어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 은유언어학 덕분에 답보상태였던 나의 시각언어 이론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차 최봉영 샘을 만났고, 선생님의 한국말 연구 덕분에 나의 시각언어 이론의 방향성을 확고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지난 일년은 은유-신경언어학과 최봉영 샘의 한국말 연구를 시각언어 이론에 접목시키는 과정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이론을 어떻게 잘 정리해 기록하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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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각언어는 디자인만이 아니라 미술까지 포함한다. 현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은 의미있는 요소만이 아니라 추상적이 요소들을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들은 멋진 이미지를 잘 만든다. 하지만 자신들의 다루는 요소, 즉 '추상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비유를 하자면 영어는 잘하지만 각각의 '알파벳 요소'들은 무엇을 의미하지는 모르는 상황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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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문자의 자소나 소리의 음절이 조합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문자의 자소와 소리의 음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핀다. 마찬가지로 시각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디자인과 미술에 쓰인 의미요소와 함께 추상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야 한다. 문제는 추상요소다. 의미요소야 관습과 기록이 있기에 파악할 수 있지만 추상요소는 도무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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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업시간에 '원'과 '세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추상요소인 '원'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없다. 그냥 '원'이다. 하지만 '원' 옆에 '세모'가 놓이면 이상하게 둘의 차이가 느껴진다. '원'과 '세모'는 모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추상요소인데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첫번째 차이는 꼴(모양)이다. 두번째는 소리의 느낌이 다르다. 동그라미는 확실히 'ㅇ'발음이 느껴지고, 세모는 확실히 'ㅅ'발음이 느껴진다. 더불어 맛도 촉각도 다르다. '원'에서는 매운맛이나 따가운 느낌을 가지기 어렵다. 옆에 '세모'가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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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요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시각적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원과 세모의 경우처럼 추상요소가 서로 비교되면 둘의 느낌이 확실히 달라진다.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들이 하나로 어울려 느낌의 구분이 확고해 진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경험할때 하나의 감각만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신경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신경들은 어떤 연결망을 형성해 하나의 느낌패턴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를 감각들이 서로 함께한다는 점에서 '공감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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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마찬가지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에서 말은 신경패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단순히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2세대 인지과학자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고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언어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말의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학에는 각종 이론들과 주장들이 있는데, 유독 은유언어학만이 현대 인지과학에 적용되었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은유언어학을 '신경언어학'이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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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봉영 샘을 만나기 전에 시각언어의 추상요소들의 원리를 파악했다. 더불어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어학, 신경언어학을 접한 상태였다. 여기에 나의 모국어 한국말의 말소리차림과 말뜻차림이 더해지면서 시각언어 이론은 한층 풍성해졌다. 무엇보다 나는 작년까지 시각언어이론을 디자인과 예술의 분과 이론 정도로 여겼는데, 최근에 이 이론이 모든 학문의 기초이론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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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말소리차림'을 만들었고, 최봉영 샘이 '말뜻차림'을 만들었다면 나의 이론은 '말느낌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언어 이론은 말소리만이 아니라 이미지까지 포괄하기에 다양한 문명의 언어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언어의 가장 밑바탕을 다루는 것일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앞서 언급한 시각적 '추상요소'의 조합원리를 청각적 '추상요소'로 확대함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말을 배우고, 말을 만들고, 말로서 소통하는지 그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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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형성에 대한 나의 가설은 이렇다. "사람이 태어나 겪는 다양한 경험들은 특정 소리로서 몸에 배인다. 특정 소리가 몸에 배이는 과정에서 다른 감각들과 어울려 신경패턴이 형성된다. 덕분에 특정 소리는 어떤 확고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소리=느낌이 연결됨으로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여러 느낌의 소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 지면 소리의 의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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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아'라는 소리는 그 자체로는 별 느낌도 의미도 없다. 하지만 '아'라는 소리가 '어'라는 소리 옆에 놓이면 의미는 몰라도 느낌이 구분된다. '아'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느낌이고, '어'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 "아!"라고 소리내고, 어떤 대상에 놀라면 "어!"라고 소리낸다. '어'는 'ㅁ'발음과 어울려 '엄'이 된다. 'ㅁ'발음은 그 자체로 아무런 느낌도 의미도 없지만, '어+ㅁ=엄'이 되면 '엄'이라는 어떤 느낌을 가진 소리가 된다. 여러분에 이 소리를 듣고 바로 '엄마'라는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엄마'는 '어+ㅁ+아'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즉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어'가 나에게 머무르고 다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아'가 된 느낌이다. '엄'과 '아'는 단순히 느낌을 가진 소리지만 '엄마'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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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추상요소들이 조합되어 단순한 느낌요소를 만들고, 단순한 느낌요소들이 다시 조합되어 단순한 의미요소를 만든다. 그리고 단순한 의미요소들이 조합되어 복잡한 의미요소를 만든다. 가령 'ㅇ' 'ㅓ' 'ㅁ' 과 같은 한글 자소는 그 자체로 아무 느낌도 의미도 없는 추상요소다. 이 요소가 비교되고 조합되어 '엄'이라는 소리를 만들고 이 소리는 경험적 신경패턴을 형성해 특정 느낌을 대변한다. '엄'이라는 느낌요소가 '아'라는 느낌요소가 조합되어 '엄마'라는 단순한 의미요소를 만든다. 그리고 이 '엄마'는 다른 의미요소들과 어울리면서 복잡한 의미요소로 성장하게 된다. 의미요소로서 말은 성장한다. 인지심리학자 비고츠키의 <생각과 말>에서 단순한 말의 의미가 경험을 통해 복잡한 말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험적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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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언어학은 이 복잡한 의미요소를 '상징'이라 말한다. '상징은 언어이고, 언어는 상징이다' 현대 언어학은 오로지 '상징=심벌'만을 언어로 여긴다. 독일 관념 철학자 에르스트 캇시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오로지 '상징'만으로 인간의 존재를 살핀다. 현재 '아이콘'과 '인덱스' 등은 언어학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용어는 실용주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본 디자인이론가 무카이 슈타로는 자신의 시각언어이론에서 '심벌'과 더불어 '아이콘'과 '인덱스'를 언어적 요소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콘과 인덱스는 심벌로 구별되는 표현요소로만 여길 뿐, 이들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슈타로의 이론에서 아이콘과 인덱스는 심벌과 구분되어 분절된 상태이고, 현대 언어학에선 여전히 아이콘과 인덱스를 언어요소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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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벌과 아이콘, 인덱스를 모두 언어요소로 여긴다. 나아가 이 용어들, 아이콘, 인덱스, 심벌이 모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최초의 소리는 아이콘이 된다. 시각언어에서 아이콘은 단순히 그림요소로만 여겨지지만 그 본질은 이미지를 연상하는 매체이다. 소리도 아이콘이 있다. 가령 '풍덩'이란 소리는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아악!'이란 소리는 누군가가 놀라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소리가 이미지를 연상시키다는 것은 어떤 느낌의 방향성, 즉 지표성을 띈다는 말이다. 이 지표성이 바로 '인덱스'이다. 추상적인 소리는 아이콘과 인덱스의 성질이 없다. 이 추상적인 소리가 경험을 통해 비교되고 조합되면 특정 느낌을 형성함으로서 '아이콘'과 '인덱스' 성질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성질들이 복잡해지면서 '심벌=상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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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추상에서 느낌(아이콘+인덱스)으로, 느낌에서 의미(심벌)로 이어지는 과정은 시각언어와 소리언어 등 모든 언어에 바탕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를 이미지이론으로 쓰면 '시각언어이론'이고, 한국말이론으로 삼으면 '말느낌차림'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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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느낌차림'에 대한 나의 관점과 생각은 말에 있어 나만의 블루오션이다. 세종이 '말소리차림'을 살펴 '한글'을 만들었고, 최봉영 샘이 '말뜻차림'을 살펴 '한국말 말법'을 만들었다면, 나는 '말느낌차림'을 살펴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접근은 어떤 매체나 법칙을 만들긴 어렵다. 하지만 한국말 소리요소들이 각각 어떤 신경패턴을 형성되는지 알 수 있다면, 나아가 이 신경패턴이 한국사람의 공통의 신경패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이 연구가 인공지능의 언어학습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학이 신경언어학에 바탕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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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내 시각언어 강의록의 일부이다.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보관된 글 하나를 공개한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면서 쓴 글이라 다소 거칠지만, 앞선 나의 시각언어 이론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할 정도는 될 것 같아 첨부한다.
https://brunch.co.kr/@tigeryoonz/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