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철학책을 읽는다. 그 유명한 센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샌델은 줄서기로 포문을 연다. 줄서기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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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기치는 부당하다. 왜 그럴까? 센델은 복잡하게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사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은 어떤 의지(의도)를 갖고 규칙을 만든다. 규칙은 형태로 드러나고, 우리는 그 형태에서 규칙의 의지(의도)를 짐작한다. 그것이 줄서기 형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줄서기 규칙을 지킴으로서 의지를 실현한다. 이것이 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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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치기 하는 사람은 줄서기 형태에서 의지를 읽었음에도 그 의지를 배신한다. 모두의 규칙을 깨고 자신만의 규칙을 적용하려 한다. 그래서 새치기는 불공정하다. 사람들은 암표나 대신 줄서기 등으로 교묘하게 새치기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새로운 경제적 가치 창출이라며. 나는 이 말을 더 멋지게 포장할 수도 있다. 새치기는 ’프레임 혁신‘ 혹은 ‘창조적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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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경제와 정치, 사회와 과학, 각종 종교가 규정하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이 얽혀 있다. 문제는 우리 시대가 ‘정치가 지배하던 경제’ 과거 사회에서 ‘경제가 지배하는 정치’ 현재 사회로 넘어왔다는 점이다. 우리의 도덕적 가치, 인간의 정의는 과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적 맥락은 현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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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고, 정치는 인간을 이타적 존재로 인식한다. 사회는 인간을 개인=주관적 주체로 보고, 과학은 인간을 단백질=객체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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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사회학과 짝을 이루었다. 경제학은 본래 물질의 분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 이기적 인간으로 효용가치에 따른 선택과 포기의 주체(사회학)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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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삶의 모든 것이 경제적 선택(효용가치)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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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감정을 너무 단순하게 본다는 점이다. 인간의 감정은 접근과 회피, 흥분도 등 정동에 따른 엄청난 스팩트럼 갖는다.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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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가치의 이익은 이기심에 아니라 이타심인 경우도 있고, 주체가 아니라 객체적 관점일 수도 있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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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따라 태도도 달라진다. 독립적인 태도로 계약을 할 수도 있고, 기억을 핑계로 인과적 관계, 연기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역할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할 수도, 쪽으로 존재를 규정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감정 기반으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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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의미는 두가지 조건을 갖는다. 하나는 개인적 주체이고, 또 하나는 개인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냐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부지런헤지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만큼 존재적 의미는 개체와 맥락이 복합적으로 연결되고, 인간의 경우 그 연결이 감정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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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 시간 예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면서 생각(의미, 의지, 의도)이 어떻게 감각(형태, 형식, 규칙)으로 연결되지를 고민해왔다. 그 결과로 시각언어 이론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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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는 언어를 이미지로 보는 태도이다. 언어가 생각이라면 이미지는 감각에 해당된다. 이 둘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바로 ‘감정’이다. 모든 정보의 응축적 결과인 이 감정이 무엇으로 드러나냐가 언어, 예술, 디자인 등 인간의 소통 문제에 있어 가장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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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델 철학에 대한 나의 가장 큰 불만도 감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감정 문제를 교묘하게 피한다. 아직 반만 읽었지만, 왠지 이 책도 왠지 그런 느낌이다. 감정을 건드리면서 감정 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본래 철학이 그런건가. 문학에게 영역을 양보하기 위해? 그렇담 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