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시학 : 경계, 생명, 그리고 죽음에 관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감상평

by 윤여경

'마코프 블랭킷(Markov blanket)'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코프는 러시아 수학자의 이름이고, 블랭킷은 담요를 뜻한다. '마코프의 따뜻한 담요'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유 에너지(free energy)' 개념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이론물리학자인 칼 프리스턴(Karl Friston)은 생물학과 물리학을 통합하기 위해 '자유 에너지 최소화의 법칙'이라는 라그랑지안(Lagrangian) 통계 이론을 주장한다. 자유 에너지란 물질들 사이에 일어나는 유용한 에너지의 양을 의미한다. 자유 에너지가 높다는 것은 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것이고, 무언가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유 에너지가 낮다는 것은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아 시스템이 안정되었다는 의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즉 안정된 평형 상태일 때 자유 에너지는 최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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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즈마 상태에서 자유 에너지가 활발하게 오가다 보면, 우연히 어떤 경계가 만들어진다. 경계 안은 자유 에너지가 안정된다. 경계를 두고 양쪽은 자유 에너지가 높고 닫힌 계는 자유 에너지가 낮아 안정된 상태가 된다. 이때 그 경계를 마코프 블랭킷이라 한다. 즉 마코프 블랭킷이란 자유 에너지가 비교적 낮게 안정된 하나의 닫힌 계(system)의 경계를 의미한다. 블랭킷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구분되는데, 안쪽은 자유 에너지가 낮고, 안과 밖 사이의 경계면은 자유 에너지가 높다. 이 경계는 처음에는 비물질적 상태이지만, 반복이 거듭되면 결국 물질적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경계가 바로 생명체의 피부다. 피부를 경계로 생명체의 몸 안은 자유 에너지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몸 안과 밖의 경계면에서는 자유 에너지가 활발히 오간다. 나아가 국가의 경계나 언어의 경계 같은 사회적 현상도 마코프 블랭킷과 자유 에너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물리학은 생물학, 나아가 인문학과도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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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해한 개념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멸의 시학》 전시를 관람하면서 오랜만에 생명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은 물리학적 시공간 개념임과 동시에 생물학적 경계 개념이고, 나아가 존재성과 인식성에 대한 고도의 관념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두 전시는 안정적인 일상을 자극해 죽음이라는 불안감을 다시 불러온다. 라그랑지안식으로 말하자면, 자유 에너지가 최소화된 상태의 우리 몸에 자극적인 작품으로 감각을 깨워 생각의 자유 에너지를 높이려는 의도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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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시학》은 작품의 시간성을 주제로 삼은 전시다. 통상적으로 미술관은 변하지 않는 완결된 작품을 전시한다. 그러나 이 전시는 이례적으로, 전시 공간에 놓인 물질들이 변화하고 섞이며 소멸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보여준다. 어두운 공간에 한 사람씩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마치 관 속에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작품을 본다기보다는 어떤 현상을 보도록 구성한 전시라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이 전시는 작품의 공간성이 아닌 작품의 시간성을 전시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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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생명이란 일종의 경계 시스템이다. 닫힌 경계를 두고 내부와 외부가 분명히 나뉜 상태다. 닫혀 있는 내부의 자유 에너지는 최소화된 상태를 유지한다. 경계면에서는 내부와 외부 사이에 자유 에너지가 활발히 교환된다. 내부는 외부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안정된 에너지 상태를 보존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 현상의 원리다. 만약 내부의 경계가 무너지고 내외부의 자유 에너지 교류가 낮아지면, 경계는 모호해지고 점차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경계가 사라지고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그것이 바로 소멸이며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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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시학》 전시의 첫 장면이 바로 흙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흙은 초기 지구의 암석들이 분해된 독특한 존재 양식이다. 암석이 흙이 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온갖 박테리아와 균류, 식물 등에 의해 암석이 오랜 시간 분해되어 흙이 되기 때문이다. 흙은 암석과 생명체의 경계가 사라진 소멸의 상징적 상태이며, 인류가 오랜 시간 은유해 온 죽음의 형태다. 한국말에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흥미롭게도 흙은 죽음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비옥한 토지에서 작물이 잘 자라듯, 지구는 흙이 있기에 다양한 생명의 진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흙은 죽음인 동시에 생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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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펼쳐진 전시관을 지나면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하는 외부 정원을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정원에는 풀과 나무와 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다음 전시관으로 이어지면서 돌 위에 놓인 과일이나 다양한 물질들이 썩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사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하고 썩어 가는지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썩는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닫힌 경계가 열리고 경계 안으로 새로운 생명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어떤 고집을 풀고 외부와 소통한다는 것이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흙이 될 것이다. 노장사상으로 유명한 장자가 자신의 시체를 길에 버리라 했던 것도 이런 태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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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개념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무덤을 상상하게 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매장 풍습이 있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시신과 함께 매장했지만, 지금은 무덤이 시신만 매장하고, 아름다운 물건운 미술관에 소장한다. 이런점에서 미술관은 무덤의 한 유형이다. 고대 이집트인과 중국인들에게 황제의 무덤은 미술관이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시간이 사라진 영원의 공간으로 여겼다. 당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정성껏 만들어 무덤을 장식했다. 미술관 역시 그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완결된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다만 미술관은 무덤과 달리 사람들이 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거래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멸의 시학》에 놓인 작품들은 판매될 가능성이 없다. 작품이 전시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소멸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작품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으로 하여금 생명과 죽음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이 전시는 무덤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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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소멸의 시학》 전시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데미안 허스트는 과학과 의학의 도구를 활용해 생명과 죽음에 대한 깊은 시각을 담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석으로 뒤덮인 해골과 포름알데히드에 담긴 상어는 현대 미술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 전시에서 내가 목격한 흥미로운 광경은, 이미 작품을 알고 있는 관람객들이 감상보다 작품과 함께 사진을 찍는 데 더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긴 줄을 기다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욕망을 갖는 것일까?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에 박제된 상어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어쩌면 이 전시 기획자는 《소멸의 시학》으로 바로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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