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은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시댁에서 지냈다. 이름하여 '조부모 캠프'.
작은 기내용 캐리어에 내복 두 벌부터 그림일기장, 독서기록장, 수학 문제집, 밤에 읽을 책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야무지게 챙겨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시댁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헤어질 때의 아이 표정은 그저 밝기만 했다.
나: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 게 왜 좋아?
첫째: 엄마, 나는 할머니 자체가 좋아요.
시댁에서 2박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지난겨울에 지속적으로 할머니집에서 자보고 싶다고 해서 2박 캠프를 한 번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았는지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할머니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를 예뻐하시는 시부모님의 허락 하에 이번 방학에도 또 가게 된 것이다.
아이를 돌봐주신 아버님과 어머님께 감사한 마음이 컸다. 영상통화나 음성통화를 할 때마다 상기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딸아이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오늘, 딸을 데리러 가기 위해 둘째, 셋째와 우리 부부는 다 같이 집을 나섰다. 시부모님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 식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첫째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자기주장을 내세운다.
내가 내뱉는 말들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시댁에서는 연신 웃기만 하던 아이가 왜 집에 오니 이렇게 낯선 아이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이는 내게 감정을 토하듯 목소리를 높여 자기주장을 펼쳤고 나는 아이와 이성적인 대화를 하려고 끝까지 노력했다. 아이는 결국 토하듯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고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이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속상함들이 무질서하게 겹쳐져 있었다. 한 번 정리를 해 보자면......
1. 동생을 경쟁상대로 여기는 마음
두 아이는 매일 영어책을 한 권 이상 읽으면 동그라미하나를 칠 수 있다. 그런데 첫째가 캐리어에 영어책을 챙겨가긴 했지만 읽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종이를 봤는데 동생은 동그라미 두 개를 더 쳐놓은 것이다. 그 순간 속상했다고 말했다.
동생은 결국 이틀 빨리 성공할 거고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져버린 것 같아 기분이 안 좋단다. 그러면서 연신 눈물을 흘린다.
안타까웠다. 왜 성공의 기준을 타인으로 삼는 건지. 아이는 잘하고 못한 것의 기준을 가장 가까운 두 살 터울의 동생으로 삼고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는 계속 패배감을 느꼈다.
더 나아가 아이는 동생이 잘하는 것들에 대한 질투도 컸다. 엄마로서 충분히 이해는 되었지만 사실은 안타까웠다.
▶ 이런 아이에게 어떻게 뭘 더 잘하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아이들, 동생과 비교하며 못난 부분을 꾸짖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저 아이가 잘하는 것을 칭찬하며 부족한 부분을 함께 노력해 보자는 정도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2.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마음
자신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영어책을 읽지 않았으니 두 개의 동그라미를 지금이라도 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아니면 오늘 영어책을 다섯 권 읽을 테니 동그라미 두 개를 더 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건 우리가 함께 만든 규칙을 어기는 것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이기에 옳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수긍하지 못했다. 시간을 주고 방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라고 했다.
▶ 아이의 속상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 규칙을 순간적으로 나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행동은 잘못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루, 이틀 동생보다 늦더라도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설명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계속 속상해했다. 휴.)
3. 자신을 따라 하는 동생에 대한 속상함
대화를 하다 보니 아이의 복잡한 감정 속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여동생이 자신의 선택을 따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 가끔은 화가 난다고 했다. 과자를 선택할 때도,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심지어는 고른 것을 바꿀 때마저도 따라 바꾸는 동생이 너무 밉다고 했다.
영어책을 80일 동안 읽고 나면 다이소에서 인형을 사주기로 했다. 아이는 그날 인형마저 따라 살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1월부터 사고 싶었던 인형인데 그 인형을 따라 사면 정말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
지금 글로 쓰고 보니 너무 귀여운 말이지만 사실 아까 대화를 나눌 때는 진짜 심각했다.
▶ 첫째가 동생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을 줄줄 읊는 걸 보니 아이는 속으로 그 스트레스를 순간순간 삼키다가 오늘 모든 게 터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아이가 이토록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저 "네가 언니니까 참아"라고 하기에는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작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자리가 참 어렵게 느껴진다. 길고 긴 대화 끝에 겨우겨우 달래고 안아준 뒤 영어책을 한 권 읽고 동그라미 '한 개'를 치고 나서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내 손을 꼬옥 잡고 잠드는 첫째 딸의 앞머리를 쓸어주고 나니 내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고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을 만족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 작은 일에도 감사를 느끼며 그 감정을 아이들에게도 소소하게 표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쉽게 잠이 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