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스웨덴에서 ADHD 진단을 받다.
스웨덴 학교의 정기 면담을 했다. 한 학기를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 스웨덴 학교는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해서 다음 해 여름에 학년이 끝나고,
학기마다 2번 총 한 학년에 4번의 정기 면담이 있다. )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눈 가리고 아웅다웅 거리는 나의 모습을.
나는 환경을 탓했고, 이곳은 다를 것이라 여겼다. 물론 다른 것은 있다. 그러나 결론은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탓하거나 핑계를 댈 수 있다.
(달라졌다고 여기는 건, 지금은 그것들이 핑계라는 것을 알고 그 핑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진 않는다. )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가 언어를 모르니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감정이 폭발한다고 했다.
하기 싫은 것에 대해 참을성이 없고, 감정과 행동의 표현과 변화가 크다고 했다.
지시도 잘 안 듣고, 감정이 폭발하면 수업에 참여시키기가 힘들다고 했다.
아이의 문제에 대해 내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 되니 문제 자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절대 나는 고슴도치 스타일의 엄마가 아니다.
내 자식에게 관대하거나 다정하기보다 엄격한 편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고민이 되는 것이 있었던가? 해결되지도 않고 항상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이민의 결정까지 하게 된 나의 소설 같은 행보는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나?
참담했고, 분노가 솟구쳤다. 학교, 아이, 나, 나의 선택들, 전남편, 모든 것에!!!
아이들의 천국이자,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평가되는 스웨덴.
이곳 학교 생활 일 년 만에, 학교에서는 아이의 학교 생활을 1:1로 도와주는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이를 위한 선생님을 새로 고용했다. 이렇게 만나게 된 서포팅 선생님은 아트를 전공한 사람이셨다.
자상하고 천사 같은 인상과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을 아이는 좋아했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내내 선생님은 아이를 밀착 지원해 주셨다.
이런 사회 지원 프로그램은 스웨덴의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곳에 온 얼마 안 된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범위와 시행 속도는 놀라웠다.
학교의 방과 후 활동까지 포함해 아이는 거의 8시간 가까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이 긴 시간 동안 아이 곁에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다.
슬쩍 나는 내가 못하는 역할을 넘기고 싶었고, 넘겼던 것 같다.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양육의 균형을 잡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한쪽이 못하거나 치우치는 부분을 다른 한쪽이 브레이크를 걸어주거나 생각의 환기를 시켜준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모도 자신의 기질을 드러내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부모가 서로 비슷해서 같은 성향을 아이에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쪽이 혼내면 다른 한쪽이 달래며 아이의 편을 들어준다.
이런 다른 역할은 아이에게 꼭 필요한 보호소이자 양육의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혼을 고려한다면, 이처럼 양육의 균형이 한쪽의 성향으로 쏠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혼 후 아무리 평정심과 자기 수양을 통해 아이를 양육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쏠림이다.
이런 쏠림이 좋다, 나쁘다, 그러니 이혼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알면 아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고, 나도 조금 변할 수 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이해와 공감이다.
나도 이제야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결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선택 속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되고 어떤 마음과 준비가 필요한지 하나도 몰랐다.
학 년이 바뀌고,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서포팅 선생님이 계속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원을 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안갯속을 맴도는 것 같은 미팅을 몇 번 더 했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의 뉘앙스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기에,
오해도 생기고 공감이나 시원스러운 답변을 듣기 힘들 때가 많다.
결론은 아이의 진단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아이가 자폐로 보이며, 진단을 받으면 지금처럼 학교의 지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상급 학교에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니 아이에게 좋을 거라 했다.
자폐! 자폐?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지만, 난 더 이상 학교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검사를 하더라도 자폐는 아닐 거라는 나만의 아집이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의 진료 비용뿐 아니라 이를 위한 통역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너무도 다른, 이곳에 와서 색다른 많은 경험을 하는구나 하며, 쓴웃음을 날렸다.
진료를 위한 예약은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고, 거의 잊어버릴 때쯤 상담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대로 번역하면 '지역명 + 아동심리센터'라는 이름이고, 한국의 정신과와 심리센터를 합친 곳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목소리를 거의 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거리나 공원 그 어디에서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여 다투는 사람들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은 누가 목소리를 조금만 올려도 놀래거나 의아해한다.
처음 이곳에서 나도 잘 안 들리거나, 놀래서 조금 목소리를 높이면 나에게 화가 났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조용조용한 사람들 속에서 더 조용한 상담사를 만났다.
2명의 상담사와 3~4번의 미팅과 많은 질문의 설문지, 몇 가지 테스트, 학교 선생님들의 인터뷰,
그리고 상담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해서 아이의 학교 생활을 관찰도 하며, 복잡한 마음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정말 느리고 정말 오래 걸렸다.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어갈 무렵 마침내 마지막 미팅이 잡혔다. 지금까지 진행한 것들에 대한 설명과 결과를 말해 주었다.
진단 결과는 ADHD 였다.
- By E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