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일. 오리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 이제 주민등록증을 이마에 뙇! 붙이고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19 때문에 동네 맥주집을 뿌시러 갈 수 없을 뿐. 오리는 새해 첫 날부터 저녁에 친구와 둘이서 맥주집 대신 편의점에서 과일향 맥주를 사다가 치킨, 피자를 안주로 아주 조촐하게 성인이 되는 날을 자축했다.
성인이 된다는 게 꼭 술을 사거나 마실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설레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나는 이 소녀들을 위해, 새로 사서 비닐도 다 안 벗긴 차의 뒷좌석을 앞으로 꼬불쳐 파티룸을 만들어주었다. 추울 테니 이불도 내어주었다. 마음 같아선 집에 와서 먹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둘만의 오붓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추위를 감수한다 하니 그러라고 했다. 다음날 차 문을 열자마자 맥주 냄새가... 이게 무슨 일이야...
오리는 몇 주 전부터 엄청 들떠 있었다. 맛있다는 편의점 맥주를 열댓 종류 골라놓았다. 술을 사러 가서 신분증을 검사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통쾌하게 웃어제끼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순간은 너무나 허망하게 지나갔다고 한다. 카운터 직원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더니, 한껏 기대하고 내민 민증을 건성으로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다시 내주었다며 찡찡거렸다. "지문도 막 찍고 신분증 위조 판별기에 막 민증도 집어넣고 마스크 막 내려보라고 해서 얼굴도 막 확인하고 막 그랬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어?" "그 분 센스가 꽝이네." 하고 나는 웃었다. 그러게, 축포도 터뜨려 주시고 기타 치며 노래도 하나 불러주셨어야 될 것인데 말이다.
오래간만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만나서 차 안에 가랜드를 걸어놓고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갓 스무 살이 된 두 아이가 몹시도 싱그러웠다. 내게는 아직도 어려보이지만 '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둘이 처음 만난 것이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동네 문화센터 합창반에서 만나 친해진 후로 같은 시기에 발레를 시작하고 그만두었다. 교환일기를 쓰네, 자신들만 아는 별칭을 지어서 부르네, 타임캡슐을 묻네 하며 십 대를 함께 보냈다.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단짝이자, '어디선가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달려가는' 5분 거리에 살던 두 아이는 며칠 후 멀리 떨어지게 된다. 딸은 재수를 한다 하고, 딸의 친구는 대학을 간다.
꼬마 여자아이들이 어느덧 성인이 되는 시간이 나에게도 흘렀다. 성인이 된 딸을 곧 떠나보낼 때가 다가오고 있다. 오리는 멀리 할아버지 댁에 간다. 이 작은 도시에는 재수학원이 없다. 대학을 가도 이 지역은 아닐 것이다. 매일같이 지지고 볶는 시간은 정말 며칠 남지 않았는지도... 오늘 할아버지 댁에 짐을 모두 보냈다는데, 그래도 나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곁에 딸이 없는 모습보다 딸 곁에 엄마가 없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조금 더 아플 뿐이다.
성인이 되기 하루 전날인 2020년 12월 31일, 오리는 어릴 때부터 농담처럼 했던 말을 실천했다. 성인이 되는 순간에 엄마랑 치맥을 하고 싶다던... 남들은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릴 시간에 나는 두 아이와 함께 편의점에 갔다. 칼같이 법을 지키자며 그날은 내가 맥주를 샀다. 아들은 토레타를 골랐다. 치킨과 떡볶이도 샀다. 집에 와서 식탁에 셋이 둘러앉아 새해를 맞이했다. 딸이 골라준 과일향 맥주를 처음 마셔보았다. 향이 조금 다를 뿐, 취기가 올라오는 건 똑같았다. 맥주를 컵에 따를 때 잔을 조금 기울여라, 술잔을 부딪칠 때 어른 잔보다 조금 낮춰라, 술잔 부딪친 후에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잔 내려놔라 등등의 꼰대 잔소리도 곁들였다.
오리는 맥주를 두 캔 넘게 마시고 멀쩡했다. 나는 한 잔도 다 먹지 못했다. 딸은 젊고 나는 늙은 거다. 딸의 그런 모습이 낯설고 신기하다. 하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안 신기한 적은 없었다. 자식이란 정말 경이로운 존재다. 이제 내 품을 벗어나 혼자서 세상을 향해 서 있는 이 아이는, 과일향 맥주 만큼이나 새로운 일들을 혼자 겪어내게 될 것이다.
엄마가 걱정될 때, 보고 싶을 때는 내려오겠다는 딸에게 매몰차게 "오지 마." 했다.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토토를 떠나보내며 말했던 것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너의 길을 가. 이제 엄마가 너를 찾아갈게.
성인이 되는 시작을 엄마와의 치맥으로 기념해주어 고맙다. 지금껏 받은 어떤 상보다 값지고 멋있는 칭찬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딸을 품에서 내려놓는다.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기다림과 두려움은 조금 다른 모양이 되어야 한다. 딸이 낯설고 경이로운 삶을 잘 살아나가길 바란다. "어, 나 술 잘 마시네!" 하며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모습에 깔깔대던 그날처럼, 삶의 곳곳을 스스로 탐험하며 숨겨진 보물 같은 자신을 찾아내기를. 그리고 나는 이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조금 내려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