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있는 아들이 요사이 전화를 부쩍 자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두어 달에 걸쳐 들려주었을 목소리를 며칠 만에 몰아서 들었다. 날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수시로 "엄마 모해?" 하는 제 누나와는 결이 다르다. 나도 스몰토크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니 아들의 무심함이 별로 서운하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 본인의 말마따나 "이 나이에 엄마랑 둘이 영화를 보는" 보기 드문 아들이다.
그런데 며칠 내내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속을 끓였다. 아이는 화가 많이 나 있었고, 그것을 오래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사춘기도 고요하게 지나갔다. 감정을 쉽게 폭발시키는 내가 심하게 몰아세우기라도 하면 조용히 나를 쳐다보며 말대답 한 번 없이 듣고만 있었다. 나는 아이의 입술 끝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차, 하며 후회하곤 했다. 밖에서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뭐... 그럴 수 있죠." 하며 좀처럼 해명하지 않고 견뎌버리는 성격이다. 제 아빠가 그러는 것에는 화가 났었지만, 그걸 꼭 닮은 아들을 보면서는 마음이 아팠다. 나이를 먹을수록 겪어야 할 부조리도 커질 텐데,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면서 말이다.
"이번 주는 제가 뭔가 있나 봐요." 처음 전화했을 때 아이는 30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군 경험이 없어서 잘 이해하지 못할까 봐 낙서 같은 메모를 해가며 듣는데 나중에는 종이 한 장이 어지럽게 채워졌다. 담당도 아닌 일로 다른 용사의 실수에 대해 계속 혼이 난 것을 시작으로, 간부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어느 병사의 계속된 비리와 묵인, 탄원하러 갔던 동기가 훈계를 듣고 왔다는 얘기들이었다. 사실은 그동안 간간이 들었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며칠 사이에 집요하게 반복된 것이다. 옆 중대에서까지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로 심하게 시달렸다는 아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 있었다.
훈련소 퇴소식 날이 떠올랐다. 행사가 끝난 후에 펜션에 함께 앉아서 초밥과 피자를 먹다가, "옆방도 다 동기들 아니야? 아는 사람 없어?" 했더니, 별의별 방법으로 치팅하던 사람이라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했어? 하고 물으니, 아들은 대답했다. "사나이 클럽을 만들었어요." 화가 나 있는 동기들에게 끝까지 원칙을 지키자고 다독여서 야영을 마쳤다는 얘기였다. 그러던 아이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몹시 지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울 뻔했어요. 찌르고 싶었는데... 그래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거 같아요."
그 말에, 내가 23년 동안 품고 있던 '아들'의 우주가 낯설어졌다. 작년 초에 함께 수업을 들었던 다른 과 선생님이 생각났다. 부대에서 상담을 하시는 분인데, 아들이 입대한다고 했더니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하면 꼭 연락하라고 하셨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아들의 성향을 알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니 없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혼잣말을 했다. 그분의 진지함이 조금 의아스러웠는데...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내가 모르는 아들의 우주가 열렸다. 말문이 막혔다.
"야간 근무라서 이제 가야 해요."
"엄마 너무 걱정 돼. 마음이 힘들 때는 익숙한 일을 하다가도 다칠 수 있어. 아들 오늘 정말 조심해야 돼. 응?"
아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또 통화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이런저런 상상을 몰아내려 많은 생각을 했다. 입소하던 날 훈련소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아들에게 말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무조건 엄마한테 전화해. 아빠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야. 엄마, 그거만 기억해." 하나님도, 운전을 하고 있던 아이 아빠도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혼자 영원 같은 어둠 속을 헤맬 때, 그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둘이나 셋이 아닌 단 하나의 강력한 주문이 필요하다.
기도를 하고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에 아들이 꿈에 나왔다. 네 살 무렵 꼬마의 모습이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앙앙 울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에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강제로 눈이 떠졌다. 아직 아들이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불안을 가라앉히려고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했다. '아들은 잘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아들에게 긴 문자를 보냈다.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고 쓰지 않고, 엄마도 겪어봐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썼다. 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면회 가서 만나자 했다. 너무 힘들면 엄마가 무슨 일이든 할 테니 꼭 알려달라고 썼다. 그리고 주말 외출 때 쓸 수 있게 기프티콘을 보냈다. 한참 후에 답이 왔길래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쉽지 않네요." 한다. 그날은, 나도 근무하기가 쉽지 않았다.
면회를 갔다. 종일 이야기를 들었다. 손에 상처 자국이 많아졌다. "밖에 있었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흉터가 잘 아물지 않는 것에도 자꾸 서글퍼져요."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어깨도 아프다면서 왜 병원에 안 가냐고 잔소리를 하고, 꿈에서처럼 아들의 까칠한 머리를 계속 쓰다듬고, 꼭 안아보고 왔다. 방금 전에는 딸과 함께 밤 산책을 하는데 아들로부터 주말 외출을 나갔다가 들어가는 길이라며 다시 전화가 왔다. 힘든 날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목소리는 조금 편안해졌다. 다행이다. 평소에 연락이 뜸해도 좋다. 아들이 화가 날 때 망설임 없이 누르는 전화번호... 그게 있어서, 그게 엄마여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은 나도 조금 억울한 일들이 많았다. 내가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인 곳에서, 내 목소리가 잡음에 지나지 않음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쟤는 뭐야? 하는 듯한 눈빛들에 고개를 숙이며, '참고 내 길을 가자'라고 수없이 혼잣말을 하다가 지쳐버렸다. 저녁 일정에 참석하지 않고 일찍 돌아온 나에게 딸이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었다. 별 일 아닌 척했지만, 사실 잊고 덮어두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아들처럼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임을 안다.
나도 모르게 간간이 으음....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슴을 채운 고통과 머리를 채운 스트레스를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 가락으로 이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척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울 때,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주문처럼 부르는 대신 제목도 없는 멜로디로 신음을 감추곤 했다. 잡음 같은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고, 어둠은 점점 깊어졌다. 엄마가 된 후 나는 자식의 어둠을 가장 늦게, 너무 늦게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이 고통 속에 혼자 버려지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라고 부르기만 하면, 나는 곧장 아이에게 닿을 수 있었다. 비록 함께 보듬고 버티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말이다.
새어 나오는 신음을 누르며 나는 글을 쓴다.
오랫동안 나를 붙잡아 주었던 meteora를 밤새 곱씹어 듣는다.
지금은, nobody's listening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