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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Aug 22. 2022

타인의 취향

두어 달 전쯤 여름옷을 꺼내려고 옷장을 열었을 때였다. 순간 멍해졌다. '이건 누가 줬더라...' 언니들, 친구들, 친구네 형님 등등 많은 분들에게서 온 옷들이 한가득이다. 모두 입을 만했다. 요즘은 옷이 낡아서 버리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막상 한두 번 입어보니 자신과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정도의 옷들을 나에게 준 것이고, 다행히 나는 가리는 게 없었다. 꽃무늬와 레이스만 아니면 괜찮았다. 치수가 비슷하면 몸을 대충 맞춰서 입었다. "아무 거나 입어, 옷은 몸만 가리면 되는 거야." 그것이 내가 나에게 욱여넣은 생각이었다.


작년 추석에 친한 언니가 가공육 세트를 하나 주었다. 그 집에 선물로 들어왔는데 언니네는 그런 식재료를 요리에 쓰지 않는다. 식구들이 모두 아토피가 심하다는 이유였으나,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너네는 먹지?" 하며 주길래 흔쾌히 받았다. 평소에도 언니는 직접 만든 음식이나 코스트코의 이국적인 먹거리들을 가끔 챙겨주었었다. 가족 모임으로 즐겁게 만났다가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그야말로 아무런 특별할 것이 없는 날이었다. "아무 거나 먹어, 배만 부르면 됐지." 나는 그렇게 살았고, 아이들도 그렇게 키웠다.




그 유명한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주인공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날에 대한 묘사가 있다. 어느 새벽에 잠에서 깬 영혜의 남편은 아내가 캄캄한 부엌의 냉장고 앞에 서서 미동도 없이 냉장고 속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섬뜩해한다. 그날 이후 영혜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냉장고 안의 고기들을 전부 버리고 완고하게 육식을 거부한다.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내가 여태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단절의 시간을 통과하면 이상한 사람, 낯선 사람이 된다.


타인의 취향이 온통 점령해있던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그날,  나는 서너 번에 걸쳐 양팔 무겁게 헌 옷 수거함을 오가며 그 옷들을 버렸다. 고마운 마음만 고이 남겨두었다. 당근마켓에 팔아서 돈으로 교환할 수도 있었던, 버리기엔 아까운 그 옷들을 굳이 버렸다. 그러고 싶었다.


언니에게서 선물세트를 받아 집에 돌아오던 30여 분간 나는 부대찌개며 김밥이며 카레 등등 갖은 음식에 그 가공육을 썰어 넣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마치 증거자료처럼 낯설게 응시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유체 이탈해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왜 그 장면이 자꾸만 불쾌하고 부끄러웠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선물세트 겉면에 커다랗게 쓰인 제품명이 우리말로 '쓰레기'라는 사실이 느닷없이 생경하게 다가온 탓이었을까.


아직 버리지는 않았다. 1년 가까이 싱크대 상부장에 쌓여있다. 그런데 한 개도 쓰지 않았다.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저것을 먹지 않았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버려지고 걸러진 타인의 취향들이 부담 없이 거래되는 당근마켓에 팔아서 다른 식재료를 샀어도 되고, 이것까지는 다 먹고 나서 다시 사지 않기로 하면 되었을 일이다. 단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취향이라...


개인의 취향은 자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타인과 어울려 사는 한 나의 취향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취향과 부딪치는 경계를 갖게 된다. 여기까지, 혹은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이라고 선언해야 하며, 서로 다른 여럿 중 누구의 취향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 싸움이다. 아이들과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음악 취향이 전부 다른 우리 셋은 차의 오디오에 누구의 폰을 연결할 것인지를 놓고 때로 치졸하게 다툰다. 나와 딸이 대부분 아들에게 음악 선택권을 양보하는 것은 단순히 아들이 막둥이라서 누리는 특혜만은 아니다. 아들은 자신의 음악적 '힙함'에 대한 강한 부심이 있다.


자신의 취향을 타인의 것보다 앞세울 수 있다는 것은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좋게 말하자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고 다른 말로는 이기적인 것이다. 엎어치든 메치든 결론적으로 취향이란 걸 가지려면 그만큼 자아가 견고해야 하며, 다른 이들을 설득하거나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우울증과 자기비하의 세월을 사는 동안 나는 비단 먹는 것, 입는 것만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공동의 공간을 어떻게 쓸지, 심지어 내가 버는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조차도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행여 큰맘 먹고 뭔가를 사려고 내심 계획한 것이 있더라도 아이들이 그냥 흘러가는 말로라도 뭘 갖고 싶다고 하면 즉시 '큰맘'은 순삭되고 그 자리엔 죄짓다 들킨 것 같은 자책감이 흔적으로 남았다. '분수에 안 맞게 그런 걸 사려고 했었다니... 나 따위가...'


소설 속 영혜라는 인물을 하필 '채식인'으로 설정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의 가장 소수적 취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99%와 대립해야 하는 극히 '이기적'인 1%가 아닌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1%도 되지 않을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는 영혜는 주변 모두와의 불화를 감수하고라도 지켜야 할 자신의 영역, 자신의 가치를 선언한 것이다. 나 역시 가공육과 라면 대신 당근과 가지를 장바구니에 넣으려면 아이들의 입맛과 관성을 부정하고 나를 주장해야 한다. "안 돼.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랜 시간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추락에 순응하던 내겐 몹시 과부하가 걸리는 반작용이었다. 요즘은 직원들과 점심메뉴를 고를 때도 사뭇 까탈스럽게 말한다. "풀떼기 많이 나오는 데로 가자." "나 그거 안 먹는데. 너무 탄수화물이잖아."


무취향은 배려가 아니다. "난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 당신들이 골라주는 대로 먹을게."라고 말했던 건 어쩌면 모두의 취향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무색, 무향, 무취하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나 자신을 '걸러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해하고자 했던 나는 누구의 감각에도 포착되지 않아 쉽게 무시되는 투명인간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왜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큰 결정을 했어? 그거 나 무시하는 거야."라는 나의 말에 남편은 대답했었다. "무시한 거 아니야, 생각을 못한 거지." 생각을 못한 거라고? 그게 무시한 거야 이 멍청아... 타인의 취향에 저항하지 못하는 나의 두려움이 남편을, 남편 안의 나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사실 아직도 나의 무취향은 온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때로는 누군가가 점심 같이 먹자고 메신저로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감동해서 여전히 '아무 거나'를 외친다. 그러나 지금 내 옷장에 걸린 옷들이 몇 벌 되지 않지만 '이건 진짜 나'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처럼,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먹는 파프리카가 냉장고에 감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타인의 취향들 사이를 비집고 내 영역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모두의 취향에 투명하게 얹혀서 쉽게 걸러지던 무해한 아줌마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이기적인 취향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옷장과 냉장고를, 거실엔 운동기구를, 혼자만의 점심을, 오직 나만을 위한 대학원 공부를, 어느 것에도 양보하지 않은 피부과 시술을... 더는 투명하지 않아 다른 누군가의 감각에 부딪치며 호불호로 갈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로써 내가 '네 생각을 못했어'로 걸러지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무시되지 않기로 한다.

 자신에게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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