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가 없는 세상(1)

by 장완주

최근 중앙부처 국정보고가 생중계되는 며칠 동안 유튜브를 통해 빠짐없이 내용을 챙겨보았다. 지방직이지만 어차피 지방 공무원들의 업무 대부분이 중앙에서 내려오는 것이라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를 꼽자면 단연 산업통상부 김정관 장관의 HWP 관련 내용이었다. HWP 중심의 업무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사실 김 장관과 대통령이 그 업무보고 당시에 서로 공감했던 이유는 HWP가 LLM에서 읽히지 않는다는 것 하나였다. 그것은 절만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최근에 AI가 HWP를 읽는다는 것, 엄밀히는 그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말이 나온 김에, 브런치에 맨날 투덜거렸던 나의 생각을 작정하고 적어볼까 한다.


내가 마흔네 살에 공무원 시험을 본 이유는 단순했다. 짤릴 걱정 없이 자식들 먹여살릴 방법이 이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무원이 된 이후에는 가끔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잔다. 사실이다. 알고보니 이 일이 적성에 맞았던 건가?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부적응자에 가깝다. 그리고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아니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대상은 HWP와 문서중심 업무방식이다. 좀 친해져서 내 성깔을 이해해주는 직원들과 얘기할 때면 간혹 나는 독설처럼 지르곤 한다. "HWP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어." 그러면 듣는 직원들은 웃는다. 썩 재미있지는 않은 웃음이다. 으이구... 저 양반 또 저러네... 싶은 거다.


누구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HWP만 써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무원 일이 이토록 방대한데 고작 워드프로세서 하나 가지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하는 건 어그로라고 느낄 것이다. 설득하려는 시도는... 해봤지만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송로버섯의 진미를 설명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어차피 궁금해하지 않을 것인데.




기술결정론은 도구가 인간의 삶의 양식과 사회구조를 지배한다는 주장이다. 지배력이 있는 도구는 그것이 발명되기 이전과 이후 인간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는다. 바퀴는 단순한 운송수단 이상이며, 활자와 인쇄기는 책이 아니라 혁명을 만들었다. 물론 인간이 필요에 의해 기술을 만들지만, 한번 만들어진 기술은 인간을 구속하는 힘이 있다. 그 기술의 구조가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기획한다. HWP는 워드프로세서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공공기관이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HWP를 의무적으로 쓰기로 하면서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고, 공무원은 HWP가 만든 박스 안에 갇혀버렸다. HWP가 보고의 도구이기 때문에 모든 업무의 중심이 '보고'에 맞춰져 있다. 빠른 분석과 토론과 의사결정을 위해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관 장관은 "텔레그램으로 보고하면 될 것도 문서로 만드느라고 시간을 낭비하는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 시간낭비보다 더 큰 문제는 HWP가 지식과 정보의 흐름을 꽁꽁 묶는다는 데에 있다. "무슨 소리야, HWP로 보고서를 만드는 이유가 업무 공유를 위한 건데?" 일부 맞는 말이다. 1980년대까지는 말이다. HWP를 고집하다가 우리나라의 공공기관 업무방식이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버나 클라우드 기반이 아닌 개별 워크스테이션 중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과 정보가 개인의 PC 단말기에 고정된다. 현실과 괴리된 정보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시장이나 시의원에게 보고를 하려면 각 담당자가 개별 PC에 저장된, 한참 전의 죽은 정보를 흔들어 깨워서 업데이트한 후 과-국-총괄로 이어지는 '서무'라는 담당자 노드를 타고 올라가는 '취합'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메신저로 말이다. 그리고 일회성 보고가 끝나면 또다시 그 자료는 현실과 괴리된 채 개인 단말기에 죽어있게 된다.


시청에서 이러한 대규모 보고는 1년에 10회 가까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진다. 주요업무 추진계획 보고(집행부 1회, 의회 1회 따로), 주요업무 추진상황 보고(집행부 1회, 의회 1회 따로), 행정 사무감사, 신규시책구상보고, 본예산 보고, 결산 보고, 기타 등등... 작은 보고들은 시장 주관의 간부급 주간업무보고로 계속 이루어진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보고가 클라우드 아닌 워크스테이션 기반의 도구로 이루어질 때 그 죽은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끌고다니는 일에 모두 인력이 투입된다.


시청의 '서무' 노드 최상단에서 '취합'을 담당하던 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정보를 질질 끌고 와서 내 앞에 한 무더기로 쌓아놓는 이미지가 자꾸만 떠오르곤 했다. 나는 그것들을 부서 순으로 꿰어 때깔 고운 책으로 만들기까지 취합본 배포 후 수정사항 취합, 수정본 배포 후 취합, 재수정본 배포 후 취합, 최종본 배포 후 인쇄 직전 수정을 했다. 클라우드가 아니라 단말기 끼리 파일을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각 단말에서 버전 관리가 잘 될 리 없다. 수정이 반복될 때마다 죽은 정보들이 담당자들의 워크스테이션 안에 꼬이게 된다. 가끔은 전전 버전을 수정해서 보낸 담당자에게 다시 쪽지를 보내서 "지난 번 수정사항 업데이트된 최신파일에 다시 수정해서 보내달라"는 얘기를 해야 한다. 그 행정력의 기회비용을 생각해보면... HWP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정말 든다.


"그럼 딴 방법이 뭐야? 니 말은 HWP 말고 그 뭐냐, MS-Word 같은 거 쓰라는 거냐? 아니면 PPT로 보고해?"


이렇게 묻는다면 HWP에 갇혀있다는 증거이다. HWP를 MS-Word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문서와 보고 그 자체를 없애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구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고 보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빠르고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다. 도구의 한계를 깨닫는 사람은 도구 밖을 경험한 사람이다. 민간 출신의 김정관 장관처럼 말이다. 그는 보고 없이 흐르는 정보의 정확성과 속도와 위력을 체감한 사람이다. 그러니 HWP로 적체되는 정보의 체증에 위기감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정보를 끌고 다녀도 되는 조직은 상대적으로 시스템 의존도가 낮다. 서무가 취합해서 HWP로 보고하면 되니까. 공공기관의 전산 시스템 성능이 굳이 좋아야 할 필요가 없다. 데이터가 업무 프로세스 간에 자동으로 연계되지 않고 뚝뚝 끊어져 있어서 사람이 다시 입력해줘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걸 불편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AI 시대에, 정보와 시스템의 효율을 경험한 적이 없는 공무원 조직이 과연 어느 정도로 기술 리터러시를 확보하고 있을까? 이 모든 게 HWP 때문이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느린 속도와 비효율, 비 시스템적 사고에 사람들을 묶어놓고 있다.


본청이 아닌 별도조직에서 근무한 1년 동안은 보고할 일이 많지 않은 한 해였다. 소식을 듣자하니 보고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정보량은 급증하고 보고서에 모이는 데이터의 현실 괴리율이 높아지면 HWP에 갇힌 이들의 솔루션은 한 가지, 더 자주 보고받는 것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2025년, 빅데이터의 시대이다. 정보는 살아있어야 의미있다. 무수한 센서들이 실시간으로 감지한 데이터가 시스템에 스스로 흘러다니고, 복잡한 제도와 규칙을 연산으로 수행하며, 권한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현실과 괴리가 적은 정보를 포착하고, 가독성 있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있는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개인 단말에 저장된 죽은 정보를 인력으로 끌고다니는 지금의 보고 중심 업무는 그야말로 HWP의, HWP에 의한, HWP를 위한 것이다.


누가 HWP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누가 죽은 보고서 대신 살아있는 시스템과 데이터로 일하는 공직사회를 만들 것인가. 팔란티어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업무 자체를 완전히 시스템에 녹여버리는 세상에 "제목 폰트 휴먼고딕(크기 16), 본문 폰트 신명조(크기 15, 장평 95%, 자간 -5), 줄간격 160%"의 통일된 보고서를 만드는 데에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수십 일씩 매달리며 세금을 써대는 한국의 정부는 어떻게 나라를 구할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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