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의 경계

by 장완주

첫 직장에 다닐 때 삼십 대 선배들은 최신 가요를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같은 노래를 듣는다고 다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이십 대들과의 세대차이는 서태지로 드러났다. 서태지는 우리에겐 영민한 혁명가였고 저들에겐 철없는 딴따라였다. 그 얘기만 나오면 편이 갈려 진지하게 싸웠던 기억이 난다.


윗분들이 노래방에서 신곡을 부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거의 연예인 급의 환호성에 둘러싸이곤 했다. 열광하던 이들 속에 나도 있었다. 직장생활의 기본 예의랄까. 물론 진심으로 좋아하기엔 위화감이 너무 컸다. 윗분들이 아무리 잘 불러도 '연식'을 감출 순 없었다. 50대 아저씨들의 과도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크래치 창법, 어떤 노래를 불러도 숨겨지지 않는 과도한 뽕삘을, 그들은 뭐가 이상한 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 직원들은 앞에서는 환호를 보내고 뒤로는 클클 웃곤 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들은 우리 자신도 곧 그런 처지가 될 줄은 그땐 몰랐던 거다. 언젠가는 '뭐가 이상한 줄도 모른 채 이상한' 꼰대가 될 것임을, 그때 어찌 알겠나. 내 친구가 우리 집 애들에게 ‘니네 엄마 노래 좀 하던 애’였다고 말했을 때 딸과 아들은 비웃었다. 시대는 바뀌었고 나는 또 다른 뽕삘일 뿐이다.


최근에 어느 방송에서 '케첩을 만드는 재료가 뭐냐'는 퀴즈를 들은 적이 있다. 당연히 그거 아닌가, 그거?라고 생각했으나, 뒤통수 후려 맞았다. '토메이토' 라고 대답하는 사람과 '토마토'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도마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게 세대차이라며.


20대 때 '토메이토'라고 부르다가 40대가 되면서 그걸 갑자기 '토마토'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람은 최초에 입에 익숙해지고 몸에 밴 것들이 일평생 쭉 가는 것이다. 그게 그 세대의 시그니처가 된다. 나는 어른들이 '도마도'라고 부르는 걸 흉내 내고 비웃으며 '토마토'가 정답이라고 믿고 쭉 살아간다. 그 사이에 시대는 '토메이토'가 점령하고 젊은 사람들은 내 뒤에서 '토마토'를 비웃는다.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빼고 다 변하는 것, 그게 세대차이다.


한 집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딸의 소비패턴이나 윤리적인 기준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다. 딸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무너져야 하는 지점이 있다. 작년에는 한 사건을 놓고 나와 오리는 끝까지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나는 딸에게 '그건 위법'이라고 했고, 딸은 그런 내게 사과를 요구했다. "내가 사과할 일 아니야. 혹시나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어..." 했더니 딸은 대뜸 그랬다. "엄마 주변에 다 똑같은 꼰대들만 있겠지."


그래서 무섭다. 모두가 한 공간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치고 끼리끼리 보호하며 뭉쳐 산다. 도마도는 도마도끼리. 토마토도, 토메이토도. 그 경계는 잘 벼린 칼날과 같다. 끼리끼리 뭉쳐 살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넘나들려면 문제가 된다. 살짝만 스쳐도 배이고 당황하고 세상 억울하다.




딸은 디지털카메라가 막 등장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산후조리를 얼추 끝내고 갓난아기를 교회에 데려가기 시작할 무렵, 우리 교회의 젊은 얼리어답터들은 디카로 딸의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다. 딸은 그 작은 개척교회의 첫아기라서 아주 신기한 피사체였다. 나는 그중 한 사람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고, 그는 나에게 사진을 현상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교회의 젊은 청년들과 몹시 서먹하고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다.


두 개의 단독 사건, '사진'과 '관계 소원'이 정말 연관되어 있을까?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지만 후에 내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렇다.


내가 어릴 때는 사진에 대한 권리가 피사체에게 있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당시의 카메라는 희귀한 물건이었고, 소풍이나 운동회 때 학급에서 한두 명이 카메라를 가져오면 그걸로 모두의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수요조사를 했다. 사진에 얼굴이 들어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진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다. 토마토 시절의 얘기다.


디카 시대가 되면서 뭐가 달라졌을까. 모두가 카메라를 소유하는 시대이다 보니 본인이 필요하면 각자 직접 찍으면 될 일이고 내가 sns에 올린 사진이 마음에 들면 각자 알아서 퍼가면 될 일이다. 그 근원적인 변화는 디카가 사진에 대한 권리 주체를 피사체에서 촬영자로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다카를 살 때 상품 설명서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있지 않다. 표면에 드러나는 건 근원적인 변화가 아니라 세대의 경계에 비죽 튀어나온 작고 날카로운 칼조각 하나뿐이다. 전에 선배들과의 사이에 있던 서태지처럼, '내 딸 사진을 내게 달라’라는 말은 당연한 권리의 요구가 아닌 정중한 부탁이어야 하는 지점, 밟으면 푹 찌르는 예리한 칼날이며, 그것으로 이편과 저편이 완전히 구별되는 첨예한 경계.


그때 나는 멋모르고 칼조각을 밟았던 것이다. 나는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상대방은 소스라쳤을 지점이고, 느닷없이 피를 본 나도 뒤늦게 소스라쳤던 지점이다. 너무 억울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해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저 깊숙한 곳에서 두 개의 단독 사건이 서로 연결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경계와 칼날을 보았다.


작두를 타야겠다. 예리한 칼날 위에서...


개인과 집단 안에 축적된 통시적 경험들을 깊이 파고들어 이해하고 품어야 겨우 보이는 것이 세대차이다. 도마도를 비웃기보다는 왜 도마도안지 들여다봐야하고, 내가 왜 토마토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사회 변화를 무심히 흘려봤다가는 내가 밟을 칼날들을 놓치게 된다. 나는 뼈저린 소외감 속에 깨달았다.


그러나 누가 굳이 나와 칼날 위에 서주겠나. 그냥 비웃고 저 멀리 끼리끼리로 피해가면 그만이지. 결국엔 부모자식처럼 어쩔 수 없이 경계 너머를 품어야 하는 사람들끼리나 기꺼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꼰대니 위법이니 하며 예리한 칼날 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일은 딸이나 나나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지만 자기 세대 경계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밟아봐야 알 수 있는 경계, 칼 위에 서봐야 보이는 경계 너머이다.


세대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이라는 완결적인 단어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품을 수 있을 만큼 참고 품는 것이다. 부모의 세대와 나의 세대, 나의 세대와 자식의 세대, 혹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대와의 경계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기도 지겨운 이놈의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그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는 것이다. 발을 베일 것을 겁내면 경계 너머에 다다를 수 없다. 그곳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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