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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Jan 16. 2021

관상은 뭐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서 팀장님이 '재미 삼아'라며 부서 직원들에게 웹 링크를 하나 보내 주셨다. 성별을 선택하고 얼굴 사진을 올리면 관상을 봐준단다. 여기저기서 다들 킬킬 웃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있길래 그러냐고 물었더니 "주사님, 나 김옥균 상이래." 어 그래? 이 나라의 운명이 주사님에게 달렸네요, 하며 웃었다.


친구에게도 카톡으로 보내줬더니 답이 이렇게 왔다.

그러나 친구는 비혼이라는 사실


신빙성 1도 없는 깜찍한 것을 보았나. 그런데 내 사진을 올렸더니, 김옥균 저리 가라 할 만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뭐야... '여복이 많은 상'이란다. 분명히 성별을 여자라고 체크했는데 말이다. 김옥균 님에게 이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진지한 얼굴이다. 저녁에 얘기를 들은 딸도 몹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맞는 말 아니야?" 했다.


웃자고 해본 건데, 의외로 뼈를 때리는 결과가 나왔다.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니는 동안 성격이 많이 편안해진 건 사실이다. 직장에서도 특히 언니들한테 치대는 버릇이 있다. 내가 가장 편하고 사이가 좋은 그룹이 한두서너대예닐곱 살 많은 여인네들이다. 나도 정말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언니들과 있으면 자꾸 드립력이 상승한다. 그녀들은 심지어 날더러 '예쁘다'고 한다! 시력이 몹시 안 좋은 이 언니들은 언제나 나의 든든한 도피성이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이다. 내가 자체적으로 고안한 ‘사회생활 기본자원 평가’에 따르면 나의 외모 자원 지수는 10점 만점에 3.5 수준이다. 사회생활하기 몹시 피곤한 점수다. 세상이 다 언니들로 이뤄졌더라면 '여복 많은 관상'을 가진 나는 성공가도를 달렸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매우 다르다.


그냥 단순히 내 외모에 스스로 만족을 못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들과 차별들을 겪었고 노골적인 외모 지적과 비아냥들이 있었다. '재미 삼아' 썰을 풀고 싶지만 읽는 분들의 '자못 진지할 얼굴'들을 떠올려보니 굳이 쓰지 않는 게 좋겠다. 모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외모의 모자람을 비관하는 건 아니다.


객관과 비관은 한 끗 차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나의 전략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수학이 바닥이었는데 고3 때 아예 포기했다. 담임은 수학 성적만 좀 신경 쓰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며 간절하게 설득하셨지만, 나는 그나마 수학을 포기하고 해 볼 만한 과목에 집중했으니까 그만큼의 성적을 받은 거라 믿는다. 그래서 자괴감도 미련도 없다.


자기 객관화는 타인이 나를 보는 시각과 평가를,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해볼 만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일단 외모가 중요한 자리에 나는 잘 가지 않는다. 대학 때도 미팅이나 소개팅 자리는 ‘알아서’ 거절했다. 낄끼빠빠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굳이 그런 자리에 나가서 상대방도 기분 나쁘고 나도 자괴감에 빠질 이유가 뭐 있나. 사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오래 주기적으로 보면서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모임만 유지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이나 친밀감 표시도 하지 않는다. 강사 시절 함께 일했던 한 선생님은, 업무로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머, 우리 친하게 지내요."를 하셨는데 그러면 그 대화의 주도권이 선생님에게 훅 넘어가는 걸 확연히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너무나 간절히 친해지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거다. 나에 대한 객관화가 어느 정도 된 후로 나는 타인의 성공 비결을 그대로 카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호감 표시가 상대방을 경직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단서를 초반에 반복해서 제시함으로써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앞에 앉은 그 사람이 조금 긴장을 푸는 순간이 느껴진다. 일도 관계도 그때부터 비로소 진척이 된다. 멀어야 비로소 가까워지는 타입이다.


외모의 모자람은 때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평상시에는 농담도 좀 하고 흔연스럽게 지내지만 내게 예의 없는 사람들, 아무 말이나 막 하는 사람, 습관처럼 간 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몹시 단호해진다.


오래전에 회식을 하다가, 누군가의 불륜이 안줏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나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맥락이었던 것 같다. 직원 한 명이 나에게 "차장님 같으면 어떡하시겠어요?" 했다. 마치 너도 그런 적 있지 않느냐는 듯이. 나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눈을 내리깔아 그 사람을 내려보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지킬 건 지키고 삽니다." 이런 단호한 말을 해야 할 때는 진지하게 하면 안 된다. 쿨내 나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크으~~~" 한 번 붙여줘야 한다. 자, 다음 안주는 누구지?


민원 업무를 볼 때마저 외모가 친절의 기준이 되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3.5밖에 가지지 못한 나는 필요 최소한의 친밀감과 필요 최소한의 반격을 번갈아 내밀며 남들보다 조금 어려운 방식으로 산다. 여전히 쉽지 않은 나의 직장생활에, 여복은 어쩌면 가장 멋진 축복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날 생각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은 나를 더 추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냥 여복 많다는 그 깜찍한 거짓말을 믿어버릴란다. 나를 이쁘게 봐주는 콩깍지를 언니들에게 계속 씌워두고 영영 여복이 많은 삶을 누릴란다.


한 가지 더, 신빙성 1도 없는 그 사이트의 깜찍한 거짓말에 따르면 아들이 '평생 재물운을 타고 난' 관상이라 하니 거기에 줄을 잘 설 생각이다. 대체 그 재물운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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