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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Sep 02. 2020

여름이 간다

여름은 힘든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고 상처의 계절이다. 매해 여름을 마주하는 일에 주저하며, 이번에는 어떻게 하지? 망설였었다. 그나마 올해 처음으로 ‘돌파해볼까...’까지 생각이 이르렀던 건 브런치가 있어서였다. 글을 써볼까... 그러면서 마주해볼까...


그러나 여전히 내게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고 나는 여태까지처럼 멈춰 서서 뒤돌아 눈을 감았다. 멀리멀리 에둘러 돌아가며 그 시간과 그 기억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쁘게 마주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표들에 눈 감았다. 여름은, 끝내 더디고 더디다.


꾸물거리던 올해 여름도 이제 끝이 보인다. 늦더위가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고, 오리의 수능은 여전히 밀당을 하며 찐을 빼고 있지만, 모든 것이 늦춰지는 중에도 여름은 간다. 이제 미뤄두었던 뜨개질 감을 꺼내고 도안을 골라보아야겠다. 고마운 이들을 위해 알록달록 촌스러운 블랭킷도 만들고 가방도 떠야지. 이제 눈이 흐려서 수세미는 어렵겠다. 뜨개질을 하며 누군가 읽어주는 책을 들어볼까. 다행이다, 여름이 가서.


찬바람이 나면 써두었던 글들도 다시 손봐야지. 여름에 쓰는 글은 너무 거칠다. 날카롭게 손을 찌른다. 부드러운 가을바람으로 매만지고 가을비로 촉촉하게 달래서 내 속의 많은 나를 잠재워야겠다. 가시를 거두고 잔잔해진 마음으로 지친 아들을 안아주자.  누나와 엄마의 전쟁을 지켜보느라 졸아들었던 아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낫우어야지. 여름도 갔으니 이제 싸움도 덜할 것이다, 제발.


이번 비가 그치면 아침에 걸어서 출근해도 될까 모르겠다. 매일 아침엔 택시로 출근, 저녁엔 걸어서 집에 가는 중이다. 여전히 차를 사는 것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로또 맨날 사는 내 친구가 당첨되면 너 차 한 대 꼭 사 줄게." 하며 진지한 얼굴로 딸기주스를 한 모금 삼키는 H언니의 똥그란 눈에 그만 커피를 뿜을 뻔했다. 언니 친구가 당첨되는 걸 가지고 왜 언니가 내 차를 사 주는데... 그 친구가 이 사실을 알아?


가난한 자들의 농담은 별 기대도, 실망도 없어서 좋다. 그렇게, 실없고 허물없는 가을이 왔으면 한다.


https://brunch.co.kr/@tillhecalls/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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