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늘에서

1994, 신촌

by 장완주

신촌은 익숙하지 않았다. 거긴 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왕십리 주변 허름한 시장 밥집과 술집들이 더 익숙했다. ‘꽃을 던지고 싶었다’라는, 카페에나 어울릴 법한 이름의 주점에서 소주 깨나 마셨다. 그곳을 꽃다, 라고 불렀다. 기숙사에 외박을 달고 선배 언니네 자취집에서 자기로 한 날이면 꽃다에서 2차나 3차 뒤풀이를 하고 친구랑 둘이 망원동까지 걸어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전철역을 향해 걷다가 둘 중 누구라도 먼저 "걸어 갈래?" 하면 별 말 없이 역 입구를 그냥 지나쳤다.


뛰지도 쉬지도 않고 2호선 루트를 쭉 따라 걸었다. 신촌쯤 오면 다리가 아팠지만 지치진 않았었다. 인적이 드문 서늘한 밤거리는 딱히 할 말이 없어도 서먹하지 않았다. "잘 걷네, 씩씩해!" S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를 닮아 성큼성큼 걷는 나는 남자 사람 친구들과 걷는 속도가 맞았다. 두어 시간을 걷고 전철이 끊긴 시간에 언니네 집 근처인 망원역에서 택시를 타고 서초동 집으로 가는 S에게 나는 한 번도 미안하지 않았다. 미안하거나 고맙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였다. 신촌은 나에게 늘 그렇게 밤길이었다.


그 날은 왜, 무슨 일로 혼자 신촌을 걷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서늘한 밤도 아닌 뜨거운 여름날 해가 막 빌딩들 사이로 내려앉는 참이었다. 거리가 온통 붉고 유리창들은 번득였다. 그날도 다리가 아팠다. 원래 신촌은 다리가 아픈 곳인가 보다. 왕십리부터 온 것도 아닌데,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지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체 어딜 가고 있었을까.


생각나는 건 마음이 온통 가시덤불이었다는 것뿐이다. 모든 걸 그만 멈추고 싶었다는 거. 발이 무거웠고 화가 났었다는 거. 아마도 화를 낼 대상을 찾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어폰으로 들리는 노래가 잦아들면서 내 숨소리가 들렸다. 꽉 막힌 고막 안에 짐승 같은 게 살고 있는 것처럼 거칠었다. 그걸 가리려고 이어폰을 끼었던 거겠지. 사실 내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마음은 쥐가 난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백 번도 더 들은 앨범이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핑계로 선물을 받아 과외하러 오가던 전철 안에서 무한히 반복했었다. 역대급 무더위와 전철 파업으로 김밥 속 밥알들처럼 밀착되었다가 역마다 김밥 옆구리 터진 것처럼 플랫폼으로 튕겨나오던 모진 94년 여름은, 유난히 고개를 떨굴 일이 많았던 짧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짠내 나는 땀방울마다 그 음악들이 깊이 배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생경한 음악이 내 숨소리 위로 얹어졌다. 이런 곡이 있었나... 새 것일 리는 없다. 테이프는 중간에 뭘 끼워 넣을 수도 없고 CD처럼 튈 일도 없고 심지어 느닷없이 주파수가 맞은 라디오도 아니다. 그냥 매일 듣던 음악이 갑자기 낯설었던 거다. 질질 끌던 발을 멈춰 섰다. 볼륨을 키웠다. 음악은 이어폰이 아니라 거리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주 어디에선가 지구를 향해 보내는 것처럼, 하늘에서부터인지, 지는 태양에서부터인지 음악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마치 영화의 OST처럼, 음악은 이질감없이 신촌을 가득 채웠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좀처럼 눈물도 나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목이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뗐다. 일렉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빌딩들 사이로 풍성하게 울리는 속을 걸었다.


분노의 반대말은 슬픔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무감각하게 마비된,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이, 세상 가득 울려 퍼지던 그 진동에 틈이 갈라졌다. 심장에 물이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그 물기를 말리려고 길게 한숨을 쉬며 어두워져 가는 신촌을 걸었다.




어제 우연히 들은 어떤 음악이, 1994년 여름의 신촌으로 다시 주파수를 맞춰놓았다. 낯선 음악이 그 시간을 닮아서 그 시절의 음악을 다시 듣는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키우고 세상을 채우는 일렉기타와 베이스의 울림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은 밤이다. 가야 할 곳도 없이 아스팔트의 열기 속을 혼자 헤매던 젊은 낮이 아니라 뜨거운 20대의 해가 사그라든 중년의 밤이다. S도 지금은 어디선가 서늘한 중년의 가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말 없이 걷다가 내 짧은 머리를 툭 치고 "잘 걷네." 하며 웃던 친구가, 1994년 모진 여름이, 모처럼 생각난다. 다리가 아픈 걸 보니 신촌 쯤인가보다.


부활 - <별> 1993.11. https://youtu.be/Y13 rPuT0 o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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