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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Aug 25. 2022

아니야, 안 괜찮아

발행하지 못했던 글

2021. 3. 18.


봄이다. H언니가 아팠다. 이젠 계절 바뀔 때 보약이라도 한 번씩 먹어줘야 하는 나이인데. 입술이 다 부르텄다. 언니 주변에는 온통 언니만 바라보는 사람들 투성이다. 자기네 식구들에, 양가 홀어머님들에, 남몰래 돌봐줘야 하는 친정의 대소사까지,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다. 심지어 나 같은 애까지 계속 치대며 들러붙는다.


"으이구 내가 너 땜에 못 산다. 정말 손 많이 가는 애야."

"언니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언니 땜에 못 살아."


엊그제 퇴근하려고 청사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다 보니 조오오기 앞에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두르는 폼인데 가방이 없었다. 아주 퇴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언니이이이!!”를 몇 번이나 불러도 정작 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앞서 가던 다른 사람들만 힐끗힐끗 뒤를 쳐다본다. 부끄럽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 할 때다.


“야, 김00!!!!”


역시, 이제야 뒤를 돌아본다. 눈이 똥그란 걸 보니 다행히 화는 안 났다. 후다닥 달려가서 다짜고짜 팔짱을 끼고 어디 가느냐 물었다. 으응, 어디 갔다가, 어디 들렀다가, 뭐도 사야 되고, 어쩌고 저쩌고... 요약하면 딸 노릇, 엄마 노릇, 며느리 노릇을 초치기로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차로 끌고 갔다. 


"뭘 차로 가냐, 너도 일 있을 텐데. 난 걸어가도 돼에."

"알았어, 시끄럽고 빨리 타."


언니는 걸어가도 된다고 말은 해놓고 안전벨트를 매면서 들러야 할 곳들을 순서대로 읊어댄다. 우선 생선조림 가게에 가서 친정엄마 갖다 드릴 갈치조림을 픽업했다. 그다음엔 언니네 엄마가 사시는 아파트 앞에 내려다 주었다. 언니는 내리면서 차 문을 쾅! 닫았다. 내가 정말 저 언니 땜에 못 산다. '아직 새 차라고... 문 좀 살살 닫으라고 제바아아알...' 시간을 아끼기 위해 차를 돌려서 다시 주차하고 조금 기다리니 언니가 다다다 뛰어나왔다. "요 앞에 약국!" 엄마가 드시는 약, 치통이 심한 둘째 딸이 먹을 진통제를 샀다.


"자, 다시 엄마 집."


언니는 엄마 집에 다시 뛰어가서 약만 건네고 바로 후다닥 내려왔다. 하루쯤 엄마네 집에서 자도 좋으련만 언니는 시어머니에게 그런 말은 제대로 꺼내지 못한다. 이제 언니는 기차를 타고 그 시댁으로 가야 한다. 통근길이 멀다 보니 이것저것 챙길 짐들이 많아 늘 가방이 무겁다. 그래서 좀 전에도 가방 없이 종종거리며 나왔던 것이다. 사무실에 들러서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바꿔 신고 나오는 언니의 얼굴이 노랗게 떴다. 차로 데려다줄 테니 뛰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언니는 몸에 밴 초침이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차가 더 빨리 오거나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20여 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잠시 들어갔던 시댁에, '엄마를 혼자 계시게 할 수 없다'는 남편의 결정으로 언니는 그예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 후 20년 넘게 기차(전철이 아니라 무궁화호 기차)로 통근해야 했던 건 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고 언니는, 이미 오래전에 과부가 되신 친정엄마를 이 도시에 홀로 남겨두어야 했다.


버스도 띄엄띄엄 다니는 이 도시를 언니는 차도 없이 그 '짧은 다리'로(언니의 표현이다) 종종거리며 저토록 매일같이 뛰어다닌다. 지척에 사시는 친정 엄마에게는 가끔 저렇게 반찬거리를 사다 드리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면서 말이다. 언니가 하루 휴가를 쓴 다음날은 얼굴이 더 상해있다. 때로 친정오빠에게 필요한 서류를 챙기느라, 시어머니의 병원 정기검진을 모시고 다녀오느라 연가를 쓴다. 그러고는 '시간이 없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딸이나 남편의 일들을 미처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숨이다.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 보인다.


"아니, 발도 아픈 사람이 이런 날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타이밍 한 번 기똥차지?"

얼굴이 노란 언니를 태우고 오만 생색을 내며 기차역으로 차를 몰았다. 지쳤는지 대꾸가 없던 언니는, 사거리에서 정지신호에 차가 멈추자 뜬금없이 말했다. "며칠 전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자식들 키우려고 혼자 매일 아등바등 사는 니 모습이 보이드라. 기댈 데도 없이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울까 싶어서..." 그러고는 또 훌쩍거리고 앉았다. 나는 생각했다. 언니가 본 건 내가 아니라 언니 자신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자기가 아프고 외로웠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마음도 그리 잘 아는 거였겠지.


"나는 괜찮아 언니. 매일같이 힘들면 어떻게 살겠어.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서 좋아." 남편도 엄마도 없는 나는 괜찮은데, 남편도 있고 엄마도 있는 언니는 괜찮지가 않은지 연신 눈물만 닦았다. 초치기로 뛰어다닌 언니의 짧은 다리가 더 뛰지 않도록 기차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했다. 저녁도 못 먹은 언니는 다시 차 문을 쾅! 닫고 역 계단을 종종거리며 올라갔다.


아... 내가 정말 저 언니 땜에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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