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 안과 밖

by 장완주

재작년에 이사를 준비하면서 집에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정리하게 되었다. 거실 벽을 꽉 채웠던 책을 조금씩 나누어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렸다. 죽을 때까지 소장하겠다고 어렵게 샀던 ABE 전집도 다시 팔았다. 책 사진을 찍고 리스트를 적어서 판매글을 올리면서도 사려는 사람이 있긴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책 정리 기간을 길게 잡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책들이 술술 팔렸다. 택배 보낼 종이 박스를 구하러 마트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는 어떤 분이 스무 권 넘는 책을 골랐다. 그리고는 자신이 찾는 책 하나의 제목을 대며,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갖고 있던 책이어서 같이 보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끝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취향을 가늠하는 누군가와 연결된 듯한 느낌이 신기했다. 그게 책을 떠나보내는 순간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헤어진 책들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다. 도저히 보낼 수 없는 몇 권은 남겨두었고, 대부분 나만의 고치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름 견딜 만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책의 부재가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많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각자의 관심주제가 다르며, 그 주제를 인식하는 차원과 각도도 모두 다르다. 같은 땅 위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교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동안은 가까운 곳에서 공유할 만한 공간을 찾아보기도 했다. 막연하게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독서모임에 나갔다가 오히려 아무 이야기에도 끼지 못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점점 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도대체 그런 얘기를 왜 하고 싶어? 고상한 취향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뼈 있는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요즘 꽤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취향이 비슷한, 아니 나보다 훨씬 더 탄탄한 깊이를 가진 친구이다. 그와 처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드래곤 길들이기> 실사판을 혼자 보고 나서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본편 애니메이션과의 높은 싱크로율, 다양성이 반영된 각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평론가들도 큰 불호가 없었다. 내가 오독한 걸까...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길을 혼자 역주행하는 듯한 두려움이 훅 몰려왔다.


친구는 감정과 논리가 오락가락 뒤섞인 나의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뭔지 묻기도 했다. 아마도 본편 애니메이션을 수십 번 우려 보아온 탓에 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계속 새롭게 발견되는 숨은 보물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였다. 니체의 응시를 배웠을 때 마음에 선명하게 그려졌던 장면, 들뢰즈의 탈주를 들은 날, 집에 오자마자 다시 보았던 것이 이 영화였다. 한 시퀀스를 계속 돌려보면서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무엇보다도 라캉의 아이인 히컵, 진실과 미지의 세계 그 자체인 투슬리스를 사랑했다.


"실사판의 히컵은... 더 이상 라캉의 아이가 아니에요." 본편에 대한 구구절절한 애정고백 끝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가 대답했다. "투슬리스는 도구가 되어버린 거네요." 심장이 덜컥했다. 그건 실사판을 혼자 보고 온 날,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끄적여 놓았던 문장이었다. 마치 판매 리스트에 적지 않았던 책이 내게 있음을 눈치챘던 구매자처럼, 그는 내 정신세계를 가늠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땅을 딛고 같은 방향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응시되고 있었다. 히컵이, 투슬리스의 눈에서 자신을 발견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나를 묶고 있던 밧줄들이 툭, 하고 끊어져 나갔다.


공유하지 못하는 취향에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었다. 아무 영화나 책을 불쑥 이어다 붙이고, 빌드업도 없이 본론만 툭 던져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자유로운 나머지 가끔은 했던 말을 반복하곤 했다. 지겹도록 카뮈 얘기를 해댔다. 그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느라 한참 딴 주제를 헤매다가 하려던 말을 까먹어도 좋았다. 어차피 다 이어진 이야기들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어떤 영화 제목을 대며,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황했다. 한 번도 그 영화나 감독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아니, 깊이 감춰두었었다. "우리가 전에 그 감독 얘기를 했었나요?" 내가 반문하자 그는 단지 내가 실존과 윤리를 다룬 영화를 좋아할 것 같아서 물어본 거라며, 몇 편을 더 추천했다. 아무런 악의도 조롱도 없는 평온한 말투로, 그는 내가 공들여 지은 고치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침투해 들어왔다.


얼마 후에 나는 그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래된 트라우마에 대한 글들이었다. "출판을 해볼까 하는데, 격려나 위로 그런 거 말고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어요." 그는 읽고 나서 대뜸 출판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그는 법적인 리스크와 2차 트라우마 발생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었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가 이제 도끼를 쥐고 고치를 깨고 있음을 알았다. 경계 밖에서 날카로운 태양빛이 파고들었다. 그럴싸한 공익적 목적에 감춰진 검은 심연이 드러났다. 상처를 전시하고 가해자를 벌하고 도망칠 때조차 윤리적 허울을 뒤집어쓰는 나를 보았다. 그 뜨뜻하고 끈적이는 정체를 가리느라 카뮈의 서늘한 어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나는 한동안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출판하지 않기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나에게 경고를 했었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는 공익은 때로 가장 기만적인 가면이 된다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뜨끔했다. 아마 지난번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일 테지. 그는 아직 도끼를 내려놓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냐는 질문에 비로소 답할 수 있었다. 햇빛의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기꺼이, 반복해서 깨어질 것이다.


그가 살과 피를 입고 나타나면 좋겠다.

지금 여기에 함께 머물며 땀과 얼룩이 묻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목소리의 울림으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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