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역 청년 창업가가 운영하는 독립서점 겸 독서 펜션에 가본 적이 있다. 스무 살의 주인장은 각 방마다 주제를 정하고, 직접 읽고 추천한 책들과 그 책에 대한 생각을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적은 엽서들을 정갈하게 채워놓았다. 그 공간을 천천히 돌아보며 마치 한 정신세계의 해부도를 거닐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넓고 멋진 집을 봐도 유지관리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동을 떠올리며 한숨부터 쉬는 나에게, 자아로 채워진 그곳은 공간에 대해 부러움을 느꼈던 거의 유일한 경험이었다. 나의 정신을 해부하면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했다.
나는 여러 예술에 정신적 빚을 지고 산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글과 영상, 그림과 음악으로 배웠다. 현실 경험이 거의 없이 고립된 세계에서 자랐던 탓이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과 행동이 학교와 직장에서 괴담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숨이 막힐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유롭게 숨 쉬고 살아가는데 어쩐지 나만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내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을 공기만큼이나 가득 채운 보이지 않는 규범과 기대들은 그 공기만큼이나 만져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고개를 떨군 채 보고 듣는 일로 집요하게 도망쳐 숨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선 가상의 사람들과 사건들이 내가 현실에서 덜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게 가르쳤다. 처음부터 그런 걸 배우려고 계획하거나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처세나 경영서를 읽었을 것이다. 내가 도망친 곳은 시간과 공간과 사람, 그 이야기 속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야기가 고팠다. 무의식 어딘가에서 내게 결핍된 것을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장을 잃은 어느 겨울에는 매일 도서관에 갔다. 생계부양자의 이력서를 쓰는 대신 창가 테이블 구석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플라톤을 읽었다. 하루에 5백 페이지를 읽어도 가슴 깊은 곳의 허기를 달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종일 책에 고개를 박고 읽었다. 그러다가 종이에 눌린 글자들 위로 오후의 겨울볕이 미세한 그림자를 드리울 때면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가만히 그 굴곡을 만져보곤 했다. 고개를 들고 통창 너머의 깊고 맑은 햇빛을 향해 눈을 감았다. 글로 읽은 대화들이 내 안에 맴돌았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빚진 것이 삶 그 자체였다는 걸 말이다.
내게 예술은 그저 좋아하고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끌어안고 끙끙 앓는다. 그리고 그때 경험하는 외연의 모든 감각들이 모이면 어느 순간 비로소 낡은 고치를 벗어내게 되는 변이의 시간이 온다. 품은 것들은 더러 아프고, 더러는 안개처럼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 안에서 어떤 대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 결국 경계가 모호한 나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누가 카뮈를 좋아하느냐고 물을 때, 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내 심장이나 췌장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느낌이다. 어떤 이가 카뮈를 섹시하다고 한 말을 들은 후로는 더 거부감이 든다. 내 심장이 변질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좋아한다'를 대체할 만한 적합한 단어를 찾기도 몹시 옹색하다. '그 사람이 되고 싶다'라거나 '그 사람을 흡수하고 싶다'는 말이 예술에 대한 나의 심정에 훨씬 가깝다. 그 대상이 현실의 사람이라면 섬뜩한 표현이지만, 다행히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거나 이미 영혼이 된 사람들이다. 마음껏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다.
그가 되기 위해, 때론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탐닉하곤 한다. 그가 마치 눈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해질 때까지, 사람과 대화하듯 머릿속에서 그와 대화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가 작가라면, 한국어로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을 거의 다 읽는다. 전작(全作)주의자는 아니다. 꼭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이라기보다, 읽다 보면 더 구할 수 있는 작품이 몇 남지 않게 된다. 처음엔 책 한 권에 글자로 납작하게 눌려있던 그가 여러 작품을 거치며 켜켜이 쌓여서 뒷모습과 기질과 서사를 가진 삼차원의 존재가 된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처음 읽은 후 <통조림공장 골목>을 읽었을 때 같은 작가가 맞나 싶어서 좀 당황했었다. 그 간극 사이를 다른 책들이 촘촘하게 채우면서야 비로소 두 작품이 각각 스타인벡의 두뇌와 심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그가 피와 살을 가지고 숨을 쉬게 되었을 때 그가 나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의 언어로 말하고, 정신의 일부라도 그가 되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를 품고 지내다 보니 일상에서도 그를 보게 되었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손을 잡고 달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생쥐와 인간>의 조지와 레니가 겹쳐 보였다. AI 시대에 빅테크 기업의 대량해고 기사를 읽을 때마다, 트랙터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서부로 향하는 자동차들이 기사의 행간에 빼곡하게 들어선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중에도 문득문득 분노한 톰이 되었다가, 조지의 이야기를 듣는 레니가 되었다가, 죽음 앞에서 돌이키는 이선이 된다.
어느덧 내 안에 많은 사람과 장면들이 꿈틀거리며 오늘의 나를 지탱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숨이 가빠질 때마다 또다시 그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퇴근시간에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달듯 다급히 헤드셋을 쓰고 <레 미제라블> 오디오북을 리플레이한다. 내 등에 박히는 눈동자들로부터 도망쳐서 막혔던 숨을 몰아쉰다. 점점 비좁아지는 현생의 공간을 버티기 위해 나는 내게 허락된 대부분의 비노동시간을, 겉보기에는 거의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채 보낸다. 내 안에서는 그 수많은 조각들을 이렇게 저렇게 잇고 찢고 쌓고 붙이느라 야단법석이다.
나의 정신세계는 그렇게 거친 조각들이 무수히 콜라주된 고치 덩어리인 듯하다. 단정하게 꾸밀 수도, 주제에 따라 공간을 나눌 수도,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없다. 하나로 얽히고설킨 채 끊임없이 꿈틀대는 생물이다. 그것은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감싸며 가두기도 한다. 그 안에서 그것을 품고 오롯이 머문다. 길고 평온한 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