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각성

괜찮은 노인 되기

by 장완주

어느 날인가 신용카드 대금을 즉시결제하려고 카드사 앱을 켰다가 지출 캘린더를 보게 되었다. 한 번도 주의깊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날은 왜 그랬는지 눈에 들어왔고, 카드를 긁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 달도, 그 전 달도 비슷했다. 한 달에 사나흘 빼고는 모두 카드결제내역이 적혀있었다.


이게 맞는 건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금액이 큰 것은 아니었으나, '하루도 빠짐없이 카드를 긁는 나'는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만약 별 것 아닌 일이라면, 한 며칠 카드를 안 쓰는 것도 아무 느낌이 없을 것이다.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부터 며칠 동안 꼭 필요한 공과금이나 기름값 말고는 카드를 쓰지 말아보자.


그런데 놀랍게도 별 것 아닌 일이 아니었다.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다. 지독한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그것도 죄책감을 동반해서 말이다. 알콜, 담배, 게임 등 '중독'이라는 이름이 붙는 대부분의 것들은 나쁘다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중독을 벗어나는 것은 권장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낭비나 사치 없이 합리적인 소비를 해왔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그걸 나쁜 것, 개선해야 할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저렴할 때 대용량으로 여러 개 사놓으면 배송비까지 아낄 수 있으니 가성비가 높고, 필요한 것들이니 떨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 것도 사지 않는 최초의 며칠 동안 엄청난 금단의 스트레스가 지나가자, 정신이 좀 맑아졌다. 과연 그 소비패턴이 합리적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필요한 것을 저렴하게' 산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내가 그 필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쇼핑은 필요한 것을 타겟팅해서 찾아가기보다는, 일단 가서 보니까 '마침' 필요한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온라인 쇼핑 사이트나 집 근처 마트에 들르는 것은 습관에 가깝다. 가보니 '마침' 싸게 팔고, '마침' 집에 몇 개 안 남았다는 것이 떠오르는 순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소비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자기기만인 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 후에는 조금 쉬워졌다. 습관처럼 마트에 가지 않게 되었고, 쇼핑 앱과 당근을 습관적으로 누르던 손꾸락을 달달 떨며 참았다. 계란을 사야 한다는 강박이 들 때면 냉장고에 사다놓은 두부를 떠올렸다. 양파가 떨어져서 초조해지면, 당분간 집에서 밥 해먹을 일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세일하는 식재료는 '딱 한 개만' 샀다. 굳이 음식을 대용량으로 만들어 남들 나눠주던 오지랖도 줄였다.


소비를 줄이는 챌린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식료품 소비가 줄자 덩달아 전반적인 쇼핑 횟수가 줄어들고 카페에도 덜 가게 되었다. 나의 생활방식에서 소비가 차지하던 시간이 매우 컸다는 사실에 놀랐다. 생활반경이 줄었고, 딸과 덜 싸우게 되었다. 잔뜩 음식을 만들어놓고 먹기를 강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갑자기 본의 아니게 노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퇴직한 후에는 매월 받던 급여보다 연금 수령액이 많이 줄어든다. 그러나 소득절벽에 비해 소비패턴은 하방경직성이 있어서 외식할 때 소고기 먹던 사람이 갑자기 닭고기로 만족하기는 어렵다. 원두커피 마시던 사람에게 내일부턴 봉지커피 마시라고 하면 우울증이 온다. 괜찮은 노인이 되려면, 평온하게 늙어가려면 퇴직 전부터 자기 수준에 맞게 소비를 낮추며 적응해야겠지. 이렇게 미리, 천천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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