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란 명목의 폭력

후회하지 않을 자유

by Fifth Life

한국에 세바시가 있다면 미국엔 TED Talks가 있다.

세바시와 컨셉은 비슷하다. 성공한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실패담으로 시작해, 그 실패가 어떻게 의미 있는 성공으로 이어졌는지를 나누는 구조의 강연 무대이다. 간혹 자살시도 생존자들이 이 무대에 등장해 얼마나 그때의 시도를 후회하는지, 그 이후로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게 됐는지 이야기하는 영상들이 나의 알고리즘에 뜨곤 한다. 이런 무대들은 흔히 박수와 눈물 속에서 마무리된다.

문제는 그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이 모든 자살시도자들의 입장을 대표하듯 유통될 때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그로부터 깨달은 레슨을 나눌 권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경험이 곧 모든 자살시도의 본질이 되는 순간, 서사는 개인의 증언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이 된다.

"자살은 한순간의 충동적인 선택", 혹은 "반드시 후회할 선택"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죽고 싶다 호소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유와 인권을 박탈해서라도 자살을 뜯어말려도 된다는 면허증을 쥔 듯 작동하는 사회가 나는 역겨웠다.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 돌아다닐수록 사회는 더욱 쉽게 확신하는 것 같았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살려두면 나중엔 무조건 감사하게 될 거라고...

이것이 가스라이팅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생명을 끊어서라도 멈추고 싶은 고통이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생략한 채, 자살 충동을 용기 내 드러내는 모든 이들은 환자가 되기 전에 먼저 위험물이 된다.

설명할 시간도, 준비할 권리도, 동의할 여지도 없이 격리되고, 감시되고, 그 비용까지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이 모든 개입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며 그 선의를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바로 저 무대 위의 후회담들이다. 하지만 그 서사에는 언제나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다. 끝까지 살아남지 못해 다시 시도한 사람들,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양가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후회하지 않고, 아직도 죽음을 하나의 선택지로 남겨두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는 책임지지 않으면서 생존만을 연명시킨다. 그리고 자살시도 이후의 삶이 그다지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더 버거워졌다 말하는 이들에겐 마이크를 쥐어주지 않는다. 희망적인 메시지 만을 배움이라 믿고 싶어 하는 이 사회가 나에게는 폭력적이고 넌더리 나는 도덕극처럼 느껴졌다. 고통에 공감하기보단 희망이란 우물 안에서 만들어진 서사로 통제를 정당화하고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살려냈다'는 착각 속에서 자부심을 채우는 모습에 난 아직도 깊은 혐오감과 거부감을 느낀다. 섣부른 미화는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생각도, 옹호할 생각도 없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건 나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통제적으로 호흡을 강요하며 들이마시는 숨마다 숨값을 요구하는 건 결코 존엄이 아님을 모르는 사회가 답답하고 숨 막힐 뿐이다. 그리고 자살시도를 무조건 후회해야만 하는 선택으로 고정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애초에 태어나는 것부터가 선택이 아니었던 삶을 그만두려는 순간에만 '선택'이라는 단어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도 의문이다.

삶을 붙드는 힘은 강요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후회의 서사로 입을 막는다고 해서 갑자기 삶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는다. 때론 "너무 살기 힘들어지면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안전망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난,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살기 싫은 날이 또 오면 같이 수다 떨어요"라는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남겨질 사람들을 앞세워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들이미는 자칭 전문가들의 설교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단단한 위로가 됐다.


2023년, 네 번의 시도 끝에 소생된 후, 아직까지는 더 이상의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안 할 거냐고 묻는 말에는 늘, "약속할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다섯 번째 시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건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결국 또 죽지 못하고 살아날 경우의 대한 두려움이다. 또다시 강요될 치료와 회복하는 척 연기를 강행해야만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공포로 지금껏 살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살아낸 지난 3년이 살아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복잡한 내면을 단순화하고,

후회라는 결론으로 모든 질문을 봉인해 버리는 강연들이 더 이상 윤리의 표준처럼 소비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치유가 아닌, 서사로 포장된 폭력일 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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