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 사과 박스 세 개와 함께 가출을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엔 나까지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방 두 개짜리 집에서 할머니와 엄마아빠, 두 언니와 내가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식구는 잠시 다섯 명이 되었다가 2년 후, 늦둥이 동생이 태어나면서 다시 여섯 명이 되었다.
언니들이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 세 자매가 함께 방을 썼다. 방에는 이층침대가 놓여 있었지만, 침대엔 인형들을 재우고 웬일인지 셋 모두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복작거리며 잤다. 새벽에는 엄마 몰래 부엌에서 라면봉지를 꺼내와 생라면을 먹으며 <토요미스테리극장>을 봤다.
언니들이 떠난 후엔 유치원생이던 동생을 새 룸메이트로 맞이했다. 내가 낳은 아기라도 되는 양 새근새근 자는 작은 아기를 매일 꼭 품고 잠들었다. 자고 나면 거의 늘 혼자였다. 엄마아빠와 떨어져 자는 게 익숙지 않았던 아기는, 엄마 품 같은 언니 품이 아닌 진짜 엄마 품을 찾아 매일 새벽 안방문을 두드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도 고향집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짐을 푼 곳은 언니 둘이 먼저 살고 있던 서울의 한 빌라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으면 지하철역 주변과는 전혀 다른 동네의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자란 작은 동네의 풍경과 비슷했다. 피아노 학원에선 아이들의 더듬거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할아버지들은 서너명씩 놀이터 벤치에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역시나 방이 두 개였던 그 집에서 우리는 두 방에 나뉘어 잘 수 있었지만, 이전처럼 큰 방 바닥에 이불을 펴고 나란히 함께 잤다. 잠들면서 온갖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깔깔거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조용해졌고, 비슷한 시간에 곯아 떨어졌다. 매주 돌아가며 청소 당번을 맡아 하던 집, 큰 언니의 월급날이면 치킨과 피자파티가 벌어지던 집,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학교에 다녀왔더니 열쇠 꽂는 구멍이 아예 뻥 뚫려 도둑이 들기도 했던 집. 그 집에서 우리는 2년을 살았다.
큰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작은언니의 직장과 내 학교의 딱 중간에 있던 그 동네. 아빠는 그 동네를 택시 아저씨에게 물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동네를 알게 된 날, 아빠는 비어 있는 원룸을 빌렸다.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경의선을 내리면 나오던 그 동네. 구획이라곤 없는 골목길에 빌라들이 포도송이처럼 붙어 있던 동네. 대낮에도 술이 취해 눈이 벌개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남자들이 있던 동네. 그 동네 빌라 2층(1층은 반지하였으니 정확히 말하면 1.5층)에 이사 왔다.
이사 온 첫날부터 스산했다. 집앞에는 작은 마트가 있었는데, 커튼을 열면 어김없이 마트를 찾아 온 벌건 눈의 남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커튼을 단단히 치고 볕이라고는 없는 원룸에서 둘이 살았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언니는 새벽이면 나가 초저녁이면 잠에 빠졌다. 노는 재미를 알아가던 대학생이었던 나는 깊은 밤에 들어와 대낮까지 낮잠을 자다 학교에 가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생활리듬이 달라서 생긴 사소한 틈이었다. 깊이 잠든 시간에 불을 켜고 들어와 씻고, 옆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내가 언니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출근준비를 하는 언니 때문에 아침잠을 깨는 게 싫었다. 언니가 부스럭거리며 옷장에서 입을 옷을 꺼내는 소리, 내 화장품을 쓰는 것도 신경 쓰였다. 사소한 틈은 급속도로 벌어졌고, 하나의 방에서 우리는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려 현관문 앞에 서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방인이 된 언니를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하루이틀 늘어갔다. 나중에는 옷가지를 들고 학교에 왔다. 동아리방 소파베드에서 지내며 학교에 다녔다. 언니에겐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옷을 가지러 집에 왔더니 집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언니에게 문자해 비밀번호를 알아낸 후, 옷을 챙겨 나왔다.
며칠 후, 낮에 아무도 없는 집에 도착했다. 노트북을 켜 중요한 파일을 내 메일로 보낸 후, 노트북을 껐다. 가져온 박스에 옷을 담고, 콜밴을 불렀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은 봉고에 가뿐히 실렸다. 학교로 돌아오는 콜밴 안에서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제 나가겠다고.
스물둘, 사과박스 세 개와 함께 가출을 했다. 이제 막 2학기가 시작된 9월의 첫 주였다. 학교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괜찮은 방들은 이미 주인을 찾은 후였다. 깎아 지른 절벽 같은 비탈길 중간에 있는 한 하숙집에서 빈 방을 찾았다. 원래 방이 아니었던 방이었다. 복도 중간에 벽을 쳐 방이 된 그 곳의 창문을 열면, 밖이 아닌 하숙집 복도가 보였다. 자다가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리에 잠을 깨면, 벽 너머 방 주인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던 방. 문을 열면 작은 침대와 행거, 책상이 오밀조밀 놓여 있던 방. 빈틈이라곤 침대와 책상 사이 세 걸음 정도 걸을 공간이 고작이던 작은 방.
그 방을 빌릴 돈을 벌기 위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돌아 누우면 떨어질 것 같은 작은 침대였지만, 매일 밤 돌아와 몸을 뉘이면 땅속으로 들어갈 듯 노곤함이 몰려왔다. 네 개의 벽으로 막혀 온전히 혼자 숨쉴 수 있는 곳. 그 곳이 내 첫 번째 보금자리였다. 연락하지 않는 언니가 떠오를 때마다 폐를 찌르는 따끔함이 몰려왔다. 언니 마음을 아프게 해서 자유를 얻다니. 하지만 ‘가족은 당연히 모여 살아야 한다’는 철칙이 지배하던 가정에서 나고 자랐기에, 도망이 아니었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자유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언니에게 먼저 연락이 오기까지 매일 잠들기 전 따끔한 평화를 맛봤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평화였다. 6인가구에서 5인가구, 4인가구에서 3인가구, 2인가구를 지나 엉겁결에 1인가구가 되었다. 코딱지만 한 방에 사는 가구. 나는 그 가구의 유일한 구성원이자 가장. 내가 나를 먹이고 살리는 첫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로 20대를 온전히 1인가구로 살았다. 서른 살 여름, 생각지 못한 가족을 맞이하기 전까지.
가출하던 날처럼 이상하게 바람이 불던 여름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나는 출근을 했다. 퇴근길에 새 가족을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