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세 개, 아이가 넷인 우리 집에서 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와 방을 공유해야 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작은언니와 이층침대가 있는 방을, 초등학교 때부터는 언니 둘과 큰방을 함께 썼다. 언니들이 졸업 후 하나 둘 서울로 떠나고, 고등학교 때는 열 살 어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이 들었다.
대학 입학 후 서울로 올라와 처음 만난 방은 ‘언니들의 방’이었다. 한 쪽 벽에 거대한 행거가 있고, 반대편엔 서랍장과 화장대, 더블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언니들의 방에 얹혀 살았다. 밤마다 잠은 안 자고 셋이서 떠들었다. 내가 온 이후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행거가 자주 바닥으로 쓰러졌다. 낙엽을 풀어헤쳐 놓는 나무처럼 늘어진 행거를 올리는 일이 분기행사였다.
큰언니가 결혼을 하고, 작은언니와 원룸을 얻어 살았다. 언니가 내 화장품을 바르고 나가는 것도, 세탁기에 운동화를 함께 넣어 돌리는 것도 싫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언니는 밤늦게까지 침대에서 폰을 만지작거리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다툼이 일상이던 우리는 급기야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게 되었고, 어느 오후 나는 콜밴을 불러 짐을 싸서 나왔다.
가출한 대학생이 묵을 수 있는 방은 하숙집 한가운데 있는 침대 만한 방뿐이었다. 한 명이라도 사람을 더 받기 위해 증축된 내 방은 길어진 발톱처럼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창문을 열면 바깥 풍경 대신 하숙집 복도가 보였고, 방문을 열면 공용 화장실이 마주 보고 있었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숙집 안의 큰방으로, 친구의 소개로 옆건물 다세대 주택의 보일러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 시절의 방들은 방이 아니라 ‘잠시나마 내가 존재했다’는 하나의 푯말로 기억된다.
내가 소리내지 않으면 아무도 소리내지 않고, 나 이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온전한 내 방’을 가진 건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10평 남짓의 작은 아파트에 세들었다. 베란다는 물론, 작은 거실과 주방까지 있는 멋진 집이었다. 11층이었는데 창문을 열면 7층까지 뻗어 올라온 나뭇가지가 보였다. 친구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옆집 할머니가 노크를 하고 수다를 한바탕 떨다 가시던 방. 그 방에서 4년을 살았다.
이직으로 새롭게 얻게 된 열 번째 방은 내가 아닌 고양이를 위한 공간이었다.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방으로 알아봤고, 오래된 오피스텔이었지만 만족했다. 1층에서 복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고양이의 놀이터였다. 계단 하나도 겨우 오르던 고양이가 겅중겅중 두 계단씩 계단을 올랐다. 가진 건 계단뿐이었던 그집에서 고양이는 병들어 죽다 살아났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결혼을 하면서 가진 지금의 방은 반쯤만 내 방이다. 문을 닫으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내 공간이지만, 대부분은 문을 열고 지낸다. 문을 열면 방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집의 일부가 된다. 방은 단촐하다. 여섯 칸 짜리 나무책장, 책을 읽기 위한 좌식책상과 의자, 업무공간인 나무책상이 전부다. 이 방에 살면서 ‘내 공간’에 대한 열망이 슬며시 또아리를 튼다. 운전은 싫지만, 차를 갖고 싶어 울며 겨자먹기로 운전을 배운다.
미래의 나는 두 개의 방을 가졌다. 하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진 안채, 다른 하나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탁 트인 바깥채다. 안채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시콜콜한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 있다. 포근한 1인용 소파에 앉아, 산처럼 쌓인 물건 중 관심이 가는 물건을 한참 바라보고 쓰며 시간을 보낸다. 바깥채는 내가 아는 누구든 부담없이 놀러올 수 있는 공간이다. 해묵은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우기도 하는 한가로운 공간. 그럴 때면 모두의 방이 되는 공간이다.
아차, 쓰다 보니 반려자와 반려동물을 위한 공간을 깜빡했다. 아무렴 어떤가. 그들에게도 그들이 꿈꾸는 자기만의 방이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내게 영영 들키고 싶지 않은 방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방은 그들의 바람대로, 나의 방은 나의 바람대로 방 주인을 위해 존재하면 그뿐이다.
(20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