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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18. 2023

엄마 모양

3박 4일. 엄마가 우리집에 놀러 온 마지막날이다. 그동안 엄마가 덮었던 이불이 건조기에서 돌아간다. 그런데 이불 사이사이에 보이는 건 어제 해놓은 아기빨래. 다 돌려놓은 후 건조기에 잠시 둔 아기빨래를 못 본 엄마가 이불을 그 위에 넣고 돌린 것이다. 아… 엄마… 다급히 건조기를 끄고 아기빨래를 꺼낸다. 다시 처음부터 빨래해야 한다. 아… 


엄마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딸은 자주 웅덩이에 빠지듯 그 사랑에 푹푹 빠진다. 엄마의 사랑은 아침부터 잠을 깨우며 도착한 커다란 택배상자 같은 것. 상하니까 빨리 뜯어서 정리하라는 엄마의 카톡. 열어보면 잔뜩 쌓여 있는 정체 모를 야채와, 내가 먹지 않는 온갖 과일들. 한숨을 푹푹 쉬며 정리하는 일과 같은 것. 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종류별로 담고, 한껏 무거워진 박스를 혼자 들고 우체국에 가서 부쳤을 엄마의 어제를 생각한다. 고마워야 하는데 택배상자만큼 마음이 무거워져버리고 만다. 냉장고 구석구석 낯선 손님처럼 자리 잡은 흙 묻은 식물들. 모조리 처리할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튀김을 해준다며 엄마가 베란다에 달력을 까는 것도, 산더미처럼 쌓인 튀김과 전도, 정신없이 먹고 난 후 더부룩해진 속으로 잠드는 것도 딸은 불만이다. 아침 생각이 없다는 딸에게 과일을 깎아 포크로 찍어 먹이는 것도, 드나들 일 없는 베란다를 땀을 흘리며 청소하는 것도. 복에 겨운 호사라 여겨야 하는데, 불편하다. 엄마가 가만히 소파에 앉아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기가 분유맛을 알아버려서 모유수유는 곧 못 하겠네.” 

“산후도우미가 이번 주 까지라며? 너희 둘이 애 못 볼 텐데.” 

엄마에겐 딸이 못 하겠는 것 투성이다. 참지 못하고 못 하겠단 말 대신 응원을 해달라며 버럭 하는 딸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걱정이 돼서 그러지.” 

아이를 낳으면서 생긴 안테나는 아이가 자란 후에도 엄마를 따라 다닌다. 아이의 위험을 한 발 빨리 감지하는 엄마는 생기지도 않은 수만 가지 일에 미리 괴롭다. 괴로워하다 지쳐 밤이면 곯아 떨어진다. 


곯아 떨어졌다가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안방 문을 여는 엄마. 

“가. 가. 자!” 

눈살을 찌푸리는 딸 뒤에 서서 자러 가지 못하고 딸을 한참 바라본다. 새벽에 아기를 달래는 딸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혹시나 내가 필요해지진 않을까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딸에게도 안테나가 생겼다. 엄마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안테나. 엄마를 부담스러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엄마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엄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딸은 안다. ‘왜 엄마가 하는 말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걸까’, ‘도대체 엄마한테 뭐가 불만일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물으면서 한없이 뾰족해진다.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엄마의 모든 게 거슬리기 시작한다. 내 실내화와 자신의 실내화를 바꿔 신는 것에도, 까끌한 옷을 입고 아기를 안는 것에도, 볼륨을 최대로 켜놓고 스마트폰을 하는 것에도 신경이 쓰인다. 한껏 날카로워져서는 도끼 눈을 뜨고 구석으로 가서 섬이 된다. 점점 멀어지는 엄마와의 거리. 


그러다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 딸이 더 신경 쓸까 봐 조심조심 짐을 챙기는 엄마를 바라만 본다. 역까지 타고 갈 택시를 잡고, 현관 앞에 둘이 서서 몇 분을 기다리다 택시가 왔다는 알람이 울리면 미소를 띤다. 3박4일 내내 못 한 효도를 몇 초 안에 해내려 애쓰듯이. 신고 온 구두로 갈아 신은 엄마가 인사를 한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며칠 내내 같이 있었음에도 숨길 수 없는 아쉬움. 이제 돌아가면 또 언제나 보려나, 생각하는 엄마의 표정이 이내 아득해진다. 


스무 살. 나고 자란 집을 떠나 서울로 온 후에 생긴 엄마의 표정. 버스 터미널에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 때 엄마는 늘 같은 표정이었지.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 엄마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던 날을 기억해낸다. 엄마와 살았던 기간과 따로 산 기간이 엇비슷해진 지금은, 울지 않는다. 


문 뒤로 엄마가 사라지고, 엄마가 잠깐 살았던 집을 둘러본다. 딱 엄마 모양으로 개어진 빨래, 엄마 모양으로 벗어놓은 실내화, 엄마 모양으로 잘려 반찬이 된 야채. 곳곳에서 엄마 모양을 찾아낸다. 찾으면서 그리워한다. 있을 때 잘해 줄 걸, 딸의 눈치를 살피던 엄마가 생각나서 운다. 서로의 마음을 읽으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관계가 슬퍼져서. 엄마 밥을 크게 한 술 떠먹듯, 엄마 사랑을 복스럽게 먹지 못하고 깨작이는 자신이 미워져서.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아기는 종일 엄마 품에 있다. 배 위에 살포시 올려 놓으면 잠이 든다. 언젠가는 나도 이 아이를 아득한 표정으로 보게 될 날이 오겠지. 아무리 애써도 내 사랑이 닿지 않고, 아이에게 짐이 되는 날도 오겠지. 어느 날 갑자기 쓸쓸해질 자신이 없는 두 달차 엄마는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아이를 안고 미리 쓸쓸함을 연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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