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읽기#1: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영화 <엘리펀트>
건너읽기 #1: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그리고 영화 <엘리펀트>
*건너읽기는 주제에 관련된 책과 영화를 함께 다루며 '이편'과 '저편'의 이야기를 오가는 연재입니다.
얼마 전 우리 집 현관에 퍼즐 액자가 걸렸다. 퍼즐 맞추기가 취미인 동생이 만든 것이었다. 퍼즐 맞추기는 적게는 오백 개에서 많게는 천 개나 되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구별하고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퍼즐에 빠지는 이유는, 수많은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는 완성할 수 없는 퍼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퍼즐의 조각들은 서로 충돌한다. 어렵게 짜 맞추어도 하나의 그림이 되지 못한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그림을 완성하려 사건의 조각들을 그러모은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퍼즐을 완성할 수 없다. 진실은 애초에 하나의 결론으로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콜럼바인 총격사건의 진실 또한 그렇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 <엘리펀트>는 콜럼바인을 각자 다른 곳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콜럼바인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의 시점으로, <엘리펀트>는 (구스 반 산트 감독에 의해 재구성된) 콜럼바인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점으로 하나의 참사를 들여다본다. 경로는 다르지만, 나는 두 이야기 모두 무지와 자기중심성이 이끈 참사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수 클리볼드는 아들 딜런이 살해-자살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어둠에 대해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녀는 콜럼바인이 아이들에게 가혹한 정글이었는지 몰랐으며, 딜런이 극심한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왜냐하면 딜런이 모든 것을 숨기고 괜찮은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암시하는 징후는 여러 차례 나타났다. 수는 이런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지를 후회 하며, 다른 ‘정상적인’ 가정들에게 뇌의 병에 대해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정말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을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의 주된 흐름에서는 벗어나 있는 수 클리볼드의 다른 퍼즐을 발견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녀 교육을 위해 노력했던 ‘정상적’이면서도 꽤나 ‘훌륭한’ 엄마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인정하듯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이런 모습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수의 이런 성향이 딜런에게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수의 진술은 여기서 끝나지만–나는 딜런이 수의 수치심과 딜런 자신의 수치심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수는 그녀의 책을 통해 딜런이라는 퍼즐을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에 대해, 교육에 대해, 콜럼바인에 대해 사람들이 놓치고 있던, 어쩌면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조각들을 찾아낸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사랑과 용기가 이뤄낸 결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 역시 인간이기에 놓치는 조각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바로 그녀의 자기중심성에 대한 참회라고 감히 생각한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그런 점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얼핏 보면 <엘리펀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처럼 한 인물의 내면을 추적하거나 사람들에게 무언가 깨달아주길 부탁하지 않는다. <엘리펀트>는 그저 콜럼바인의 16분을 이루고 있는 몇 개의 조각난 시선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 따돌리는 아이들, 음식을 먹자마자 토해내는 아이들, 학교의 유명한 커플인 아이들, 사진을 찍거나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거나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러닝타임도 짧고 시점도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만큼이나 영화 속 인물들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화면 속에서 때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초점이 되고, 타인의 삶의 흐린 배경이 된다. 서로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엘리펀트>는 그저 인정한다. 그리고 보여준다. 총을 쉽게 살 수 있는 미국 사회와 나치가 있었던 시대에 대한 텔레비전 영상과 따돌림당하는 학생들의 고통에 무감한 아이들을. 관객들은 여러 시점을 모아서 영화의 제목처럼 코끼리 그림을 완성해보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조각은 별로 되지 않으며 그것을 모으면 과연 코끼리가 되는지도 의심스럽다.
악은 전형적이지 않기에 악이다. 법과 도덕에 어긋나고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배반하기에 악이다. 우리는 악을 다루기 위해 교육을 이어나가고 악에 대해 사유한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는 콜럼바인이라는 악에 대한 두 가지 실마리를 얻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끝이다. 그 두 조각은 매우 도움이 되는 단서였지만 퍼즐을 완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부족한 부모, 나쁜 친구, 총기 허용, 따돌림, 폭력적인 미디어 등이 살인자를 만든다고 단언할 수 없다. 수 클리볼드가 주장했듯 콜럼바인의 비극은 어느 가족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절대 완성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지와 자기중심성, 그로부터 파생한 악을 직면해야 한다. 또한 이런 직면에도 불구하고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좋은 사람, 좋은 부모, 좋은 사랑의 퍼즐은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완성될 수 없는 퍼즐이 오히려 삶의 본질에 더 가깝다. 완성할 수 없는 퍼즐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한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비극 앞에서 더 무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