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나는 금단의 책에 심취해 있었다.
해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책들은 서점에서 구했는지, 선배에게 받았는지 이제 기억조차 흐릿하다. 얼룩진 표지만으로도 금지된 것을 손에 쥔 듯한 전율이 있었다. 밤새 읽었다. 그 책들 중에서도 칼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쓴 문장,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Jeder nach seinen Fähigkeiten, jedem nach seinen Bedürfnissen)"는 이 한 문장에 나는 심장이 뛰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가지는 세상이라니! 그 아름다운 세상은 더러운 자본주의의 모순을 무너뜨린, 내가 살아생전 쟁취해야 할 목표이자 꿈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아름다웠고, 순수했고, 뜨거웠다.
그리고 그 믿음과 열정이 나를 마리오네트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20년 가까이 몰랐다.
마리오네트에게 제 몸을 묶은 줄은 보이지 않는다. 줄을 잡고 있는 손도 보이지 않는다. 움직일 때마다 자기 의지로 움직인다고 느낀다. 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의문들이 쌓이고, 어느 순간 그 의문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보인다.
나는 오래도록 줄에 매달려 살았다.
돌아보면, 줄은 언제나 각자의 '신념'으로 만들어지고 강화된다.
6.25의 공포, 무장공비 사건, 버마 아웅산의 참극. 이것들이 만들어낸 트라우마 위에서 한쪽은 외쳤다. "빨갱이를 척결하자." "북괴 앞에서 단결하자." 총선 때마다 북풍이 불었고, 안보 위기가 표로 바뀌었다.
나는 그것이 구역질 나는 정치 공학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반대편에 섰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은 분노를 만들었고, 그 분노는 거리로 쏟아졌다. 100년 전의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외침에 고개를 끄덕였고,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외침에 주먹을 쥐었다. 미국산 쇠고기의 공포는 광장을 가득 채웠다. 촛불은 아름다웠고, 목소리는 정의로웠다.
나는 이쪽의 줄은 줄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쪽은 '정의'라고 믿었다.
내게 줄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40이 넘어서였다.
세금을 내고, 사람을 고용하고, 시장 안에서 생존하는 일을 하면서 구호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 구호가 아니라 결과.
대기업을 압박하면 중소기업과 노동자가 살아난다고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기업이 떠난 도시에서 하청 업체가 무너졌고, 하청이 무너지자 자영업이 무너졌고, 자영업이 무너지자 그 도시의 삶까지 무너졌다.
낙수효과는 없다고 외쳤던 구호 아래서, 물줄기 자체가 말라버린 것이다.
다주택자를 때리면 서민이 집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똘똘한 한 채로 몰리면서 서울 상급지는 서너 배 올랐고, 지방 서민 아파트는 도리어 떨어졌다. 민간의 임대 공급이 줄어 전셋값이 폭등했고, 전세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월세의 늪으로 밀려났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의 피해자가 서민이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것은 구호였다.
북풍으로 표를 긁어모은 정치, 안보를 장사로 만든 정치, 색깔론으로 상대를 매장한 정치. 그것이 추악하다는 내 판단은 20대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젊은 시절 내가 서 있던 쪽도 똑같은 구조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는 것이다.
한쪽은 공포로 줄을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분노로 줄을 만들었다. 재료만 달랐을 뿐, 설계도는 같았다.
공포의 줄에 매달린 사람은 "안보가 무너진다"는 말에 움직였다. 분노의 줄에 매달린 사람은 "정의가 무너진다"는 말에 움직였다. 두 줄 모두 감정으로 꼬여 있었고, 두 줄 모두 누군가의 손이 잡고 있었다. 그리고 줄이 바뀔 때마다 달라진 것은 줄을 잡는 손뿐이었다. 줄에 묶인 마리오네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는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람들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만드는 틀이다. 그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틀 안에 들어온 것만 보이고, 틀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빨갱이를 척결하자"는 프레임 안에서는 안보가 실제로 위협받는 것인지 선거를 위해 위협이 소환된 것인지가 구별되지 않는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프레임 안에서는 100년이나 지난 지금의 그 구호가 누구의 표로 바뀌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다주택자가 적이다"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전월세 폭등이라는 시장 논리가 보이지 않는다.
프레임은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적과 아군을 나눠주고, 분노할 대상을 지목해 주고, 투표할 곳을 알려준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준다.
그 편안함의 대가로 우리는 진실을 보는 눈을 잃는다.
20대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를 가슴 뛰게 하는 그 문장은 아름답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진다'는 것은 인류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이상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인간이 이기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것은 악이 아니라 본성이다. 시장은 그 본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그래서 작동한다.
네가 지금 느끼는 정의감은 진짜다. 하지만 너의 그 정의감에 줄을 묶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목표는 네가 믿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정치권력이다. 너의 분노는 권력의 연료이고, 너의 표는 정치의 목적지다. 너는 그 사실을 아는 데 20년이 걸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줄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너는 스스로 걸을 수 있다."
지금도 새로운 적이 호명되고, 새로운 분노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구호가 광장을 채운다. 프레임이 바뀔 때마다 줄을 잡는 손만 바뀐다. 줄에 묶인 마리오네트들은 여전히 춤을 춘다. 자기 스스로 춤추고 있다고 믿으면서.
나도 오래도록 그 줄에 묶여 춤을 추었다.
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늦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줄의 감촉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느끼고 있다면, 한 번만 올려다보라.
누가 당신의 줄을 잡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