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본캐가 사라진 뒤, 나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나침반 대신 ChatGPT PART 2, 부캐로 살아가기 전의 기록

by Time Right

[나침반 대신 ChatGPT] PART 2 : 길을 찾은 이후, 나를 다시 설명하기까지

11화 | 본캐가 사라진 뒤, 나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 나침반 대신 ChatGPT PART 2, 부캐로 살아가기 전의 기록


길은 찾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방향은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나의 속도, 나의 리듬,

더 이상 남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감각까지는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 나에게 “요즘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가고 있었지만,

나를 설명할 문장은 사라져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쉬웠다.


어디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면

그다음 설명은 필요 없었다.

직함과 역할이 나를 대신 소개해주었고,

그 안에는 신뢰와 거리, 존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틀이 사라지자

나라는 사람도 함께 흐릿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취향과 기록이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블로그와 브런치를 운영하고,

AI를 활용해 이것저것을 만들고 있는 사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설명은 어쩐지 나 같지 않았다.

너무 얕았고, 너무 단순했다.


특히 나를 퇴사 이후에 알게 된 사람들 앞에서는

그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그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모른다.

무엇을 책임졌고,

어떤 결정들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덕질을 하는 중년,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집에서 이것저것을 시도해 보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설명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만 정의되는 것이

마음 한편을 계속 건드렸다.


본캐는 사라진 것 같고,

부캐만 남아버린 느낌.


나는 정말로

길을 잘못 든 걸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부캐로 보이는 시간들이

완전히 공허하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AI를 공부했고,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서 독서를 더 했다.

영상 편집을 배우고,

플랫폼의 구조를 이해하려 애썼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멈추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나를 다시 앞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부캐처럼 보이는 시간들이

다음 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본캐를 잃어버린 사람의 기록이 아니다.

부캐로만 살게 된 사람의 변명도 아니다.


길을 찾은 이후,

나를 다시 설명하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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