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내가 꺼낸 이야기와, 그들이 이해한 나

관계의 시작에서 생긴 오해

by Time Right

[나침반 대신 ChatGPT] PART 2 : 길을 찾은 이후, 나를 다시 설명하기까지

12화 | 내가 꺼낸 이야기와, 그들이 이해한 나 - 관계의 시작에서 생긴 오해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왜 이 도시에 와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고향도 아닌 곳에 혼자 와 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중년 여성.


그러니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뭐 하고 지내세요?”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 질문은

무례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가장 무해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대화는 곧

각자의 삶 이야기로 이어졌다.

부모님,

배우자,

아이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속해 있는 삶의 맥락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같은 맥락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블로그와 브런치를 운영하고,

AI를 활용해

이것저것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설명했다.


나는 나의 부캐 이야기를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살면서 어떤 현실과 부딪히고 있는지에 대한

본캐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그 모든 맥락을 설명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새로 만난 사람들은

나의 부캐를

‘나’라고 정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걸

나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열심히 자기 일이 있으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를 그만두고

덕질을 하는 중년,

가정도, 직장도 없이

집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 한편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 정도로만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속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설명이

완전히 틀렸다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사 이후의 나를 기준으로 보면,

그들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무엇을 책임졌는지,

어떤 결정들을 하며 살아왔는지였다.


그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본캐가 사라진 자리에

부캐만 남아버린 느낌.


그럼에도 이상한 점은

그 부캐의 시간들이

완전히 공허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동안

AI를 공부했고,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서 책을 읽었고,

영상 편집을 배우며

새로운 형식들을 시도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당장 보상이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도피였을까.

아니면

지금의 나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한 모습이었을까.


사람들이 보는 ‘부캐의 나’와

내가 느끼는 ‘현재의 나’ 사이에는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간극이 있었다.

나는 그 간극 앞에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 질문이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도.


부캐로 사는 삶은

도망일까,

아니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일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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