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짓을 해도 신이 될 수 있다니

광인(狂人)이지만 신이 된 부탄의 카사노바

by TOMO
계단식 논을 바라보며

도출 라 고개를 지나 산을 내려오는 길 위엔 공사하고 있는 인부들 외엔 사람 한 명 찾기 힘들었다. 재미없는 풍경에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여행을 하니 우리 세 사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산길을 한참 내려오니 강을 따라 펼쳐진 계단식 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가 바로 멧시나 (Metshina)! 파로를 벗어나 처음으로 머물 마을이다. 멧시나 마을 아래로는 수많은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고, 논두렁 너머로 형성된 조그만 마을이 보인다. 마을 뒤편 언덕 꼭대기엔 잘 구별되지 않으나 위치나 모양새를 봐선 분명히 사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눈 앞의 아름다운 풍경보다 당장 내 배를 채울 진수성찬과 누워 쉴 수 있는 휴식처다. 당장 마을에 있는 호텔로 가서 일정을 마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따시는 이런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솝소카(Sopsokha)라고 불리는 마을에 데려간다.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방금 본 언덕 위 사원으로 "꼭" 가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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솝소카 (Sopsokha) 마을에서 바라본 계단식 논과 치미 하캉 (Chimi Lhakhang)

솝소카 마을의 린첸링 카페테리아 (Rinchenling Cafeteria)엔 나 외에도 수많은 단체 여행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계속 오늘 점심은 없다고 거짓말한 파상을 응징하려고 찾았지만, 파상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테라스에 앉아 배를 채우니 스쳐 지나간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계단식 논은 쌀이 주식인 아시아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장면이다. 필리핀 바나웨 (Banaue), 태국 매 살롱 (Mae Salong)과 같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우리나라 남해의 다랭이 논과 같은 곳을 여행하며 비슷한 풍경을 수도 없이 봐 왔지만 경사진 언덕 위에 펼쳐진 황금빛 논은 언제나 찬란하고 아름답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삭막한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라 그런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함을 주는 풍경 속에서 다시 한번 행복을 느낀다. 황홀함에 빠져 정신없는 동안, 종업원이 부탄에선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아이스크림을 가져다준다. 포만감과 아름다운 경치 뒤에 이어진 달콤한 디저트는 이 곳을 지상 천국으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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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린첸링 카페테리아 (Rinchenling Cafeteria)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시는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오늘 남은 일정을 마저 끝내자고 독촉하며 나의 즐거운 시간을 망친다. 현실로 돌아온 것도 서러운데 여기서 걸어서 언덕 위의 사원까지 둘러보는 것까지 마무리해야 오늘 일정을 끝낼 거라고 반 협박(?)을 한다. 마을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트레킹하는 건 당연히 즐거울 것 같은데, 저 사원에 가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는 내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이렇게 대답한다.

"부탄의 미친놈(!)을 만나러 가고 싶지 않냐?"


정말 미친 사람, 드룩파 쿤레이 (Drukpa Kunley)

따시의 말에 자극받은 나는 그의 재촉 없이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눈 앞에 펼쳐졌던 황금빛의 싱그러운 들판을 가로지르니 빠나(Pana) 마을의 집들이 나타난다. 멀리서 식별이 잘 되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약간(?) 민망한 그림들이 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다. 남성의 성기들이 벽에 그려진 이유는 저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이 아이를 점지받기 위해 수많은 부탄 여성들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그림들을 보고 나니 따시가 말한 미친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진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간이기에 불교국가인 부탄에서 이런 상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까?"

IMG_3142.JPG 치미 하캉 아래 부탄의 가옥 곳곳엔 이와 같은 민망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탄 여행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05 - Divine Madman, 드룩파 쿤레이 (Drukpa Kunley)

드룩파 쿤레이 (Drukpa Kunley, 1455-1529)는 부탄의 유명한 성인으로, 티벳에서도 등장하는 미친 선구자 (crazy wisdom) 중 하나다. 그는 샵드룩 나왕 남걀(Zhabdrung Ngawang Namgyal) 처럼 티벳의 랄룽 사원 (Ralung Monastery)에서 태어났으며, 뻬마 링파 (Pema Lingpa)의 제자로서 교육을 받으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교육을 마친 뒤 티벳과 부탄 전역을 넬로빠 (neljorpa, 요가 수행자)로 여행하게 되는데 민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노래와 유머를 사용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하지만 승려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데다 성적 집착이 심하여, 부탄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미친 성인 (Divine Madman). 그는 성직자들이 다가가기 어렵다는 편견과 엄중해야 하는 사회 통념 속에서는 부처의 진실된 뜻을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꺼이 이런 별명을 받아들인다.

불교 가르침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기 위한 그의 행동은 부탄 전역에서 지금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로베사 마을에 있는 치미 하캉 (Chimi Lhakhang)에선 드룩파 쿤레이의 동상이 있으며, 그의 삶이 사원 곳곳에 벽화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팀푸 계곡에 위치한 땅고 굄바 (Tango Goemba)는 쿤레이가 오줌을 싸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탕카 (Thangka,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된 성스러운 그림 또는 자수, 聖畵)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드룩파 쿤레이의 기행은 부탄에서만 발견되는 타킨(Takin)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소의 몸통에 염소의 머리를 붙여서 창조한 동물이라고 한다.

부탄 사람들이 쿤레이를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성(性)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도덕적이지 못한 데다 역겹기까지 했다. 쿤레이의 성적 집착은 전설로 남아있는데, 부탄의 주택 곳곳에 그려진 '날아다니는 성기'는 이 미친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겼다. 심지어 그를 재워준 집주인이나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의 아내까지 범했다고. 그리고 그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목에 걸어둔 '축복의 실 (Blessing Threads)'을 자기의 성기를 감는데 쓰면서 앞으로 여성들과 더 많은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부탄의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는 성기 그림은 생식 능력뿐 아니라 케케묵은 전통을 거부하는 드룩파 쿤레이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봤을 때 느끼는 것처럼 '사회가 진실과 마주쳤을 때 느낀 불쾌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진실을 거부한 채 진정한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허례허식에만 사로잡힌 현대의 많은 종교들의 모습을 보면 '미친 성인' 드룩파 쿤레이의 가르침과 행동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
Drukpa-Kunley-Bhutan-e1450671566898.jpg Divine Madman (출처: https://www.nwrafting.com/international/divine-madman-drukpa-kunley)

해답을 찾기 위해 눈 앞에 보이는 치미 하캉 (Chimi Lhakhang)으로 향해 언덕길을 오른다. Divine Madman이라 불리는 드룩파 쿤레이의 힘은 정말 대단한가 보다. 호랑이 굴인 타이거 네스트 (Tiger's Nest)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방문한 부탄의 많은 사원을 나와 따시 둘이서 독차지할 때가 많았는데, 치미 하캉만은 예외였던 것. 중국에서 온 수많은 여인들이 쿤레이의 영험함을 듣고 이 먼 땅 부탄까지 찾아온 것이다. 평화로운 길에서 사색을 즐기며 조용히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사원에서 만날 '미친 성인'이 부탄에선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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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 하캉 (Chimi Lhakhang)으로 향하는 길은 최고의 트레킹 코스다

언덕을 다 오르자 예쁘게 지어진 사원 옆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눈에 띈다. 마치 사원을 지키는 경호원처럼 우뚝 서 있는 이 나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인 부다가야(Bodhgaya)에서 가져온 나무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보리수나무 옆에 선 절은 부탄의 흔한 사원이랑 별반 차이가 없어 사뭇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치미 하캉(Chimi Lhakhang)은 1499년에 쿤레이의 사촌에 의해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이다. 쿤레이가 '지혜의 번개'(그의 성기를 암시)를 사용해 도출 라 (Dochu La)의 악마를 물리친 걸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했던가. 절의 외관만 보고 실망하고 있던 찰나, 내부로 들어서니 드룩파 쿤레이 (Drukpa Kunley)의 삶 그 자체가 눈 앞에 펼쳐진다. 쿤레이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애견 사치(Sachi)와 함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양 옆으로 샵드룩석가모니 부처, 1001개의 팔을 가진 죽지셰 (Chenresig)가 서 있다. 절에 모셔진 동상뿐 아니라 사원 내부에 그려진 벽화들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살아온 쿤레이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사원에서 본 그는 정말 미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승려임에도 개를 데리고 다니고 악기를 연주하며 난봉꾼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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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 하캉의 상징은 바로 거대한 보리수 나무!

따시는 약간의 시주를 끝낸 뒤, 절 모퉁이에 앉아 쿤레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듣고 보면 쿤레이는 보통 사람의 욕정을 넘어 카사노바 같은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부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진다. 4대 성인이라 불리는 예수,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위대하고 멋진 것들이다. 그들의 말은 이상적이고 고상하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하다.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드룩파 쿤레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기가 나서서 '미친놈'이 되기로 결정했다. 성스러운 존재가 되기보다 자기도 지구 상에 살아가는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갈구하는 재물, 성(性), 권력을 탐하며, 인간의 탐욕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양 행동했다. 현세에서의 삶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려운 경전이 아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노래와 행동으로 전파했다. 부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허례허식에 빠져있는 성직자들의 삶보다 쿤레이와 같은 삶이 자기들에게 더 와 닿기 때문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엔 신실하고 경건한 척 하지만, 속은 썩어있는 위선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진짜 미친 사람들은 쿤레이가 아니라 자기 사리사욕 채우기에 바쁜 성직자들일지도 모른다.

IMG_3267.JPG 사원 옆의 멋진 초르텐 (Chorten, 승탑)

따시의 설명이 끝난 뒤 뒤늦게 들어온 중국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쿤레이의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린다. 스님이 축복의 말을 하며 사용하는 쿤레이의 유품을 보면 이 광경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가 악마들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했던 활은 이해가 되지만, 나무로 된 성기를 사용해 여인들의 손과 머리를 두드리는 장면은 성스럽기도 하지만 웃음을 주기도 한다. 드룩파 쿤레이는 오래 전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현대에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수없이 저지르며 인생을 즐긴데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여인들이 자식을 점지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 그를 만나러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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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 하캉이 서 있는 언덕에는 과수원들이 줄지어 서 있다
행복한 나라, 부탄을 알아가는 과정

로베사 마을은 치미 하캉을 둘러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한다. 호텔 앞 의자에 앉아 따시, 파상과 아침에 사 온 드룩 라거 (Druk Lager)를 마시며 정말 평화로운 풍경이라고 이런 곳에서 사는 너희가 부럽다고 말한다. 따시와 파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한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수십 번을 가면 질리지 않겠냐고. 음, 난 이들이 행복한 이유가 부유하진 않더라도 부처님의 보호 속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살아가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그러면 너희 부탄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인 이유가 뭘까?"

따시는 즉답을 회피하며 내일 트롱사(Trongsa)로 가는 길에서 그 해답을 찾아가자고 말한다.

이 때는 꿈에도 몰랐다. 트롱사로 가는 길이 부탄 여행에서 최악의 기억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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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사 마을의 호텔 바라 (Hotel Vara)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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