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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Sep 17. 2018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F. 스콧 피츠제럴드 (F. Scoot Fitzgerald)

10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며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려 10년 전, 그러니까 21세 이전) 내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독서였다. 촌구석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에,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 같은 고리타분한 취미로 따분한 주말을 보내곤 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공부하고 문학에 탐닉하던 도중, 비록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립대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2007년 여름, 미국 서부 곳곳을 여행하면서 내 방랑벽은 시작되었지만, 당시 가장 충격이었던 건 미국의 수업방식이었다. 1시간 15분 정도의 수업시간에서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끝났던 한국의 수업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프린스턴대 출신의 젊은 여교수님은 1시간 동안 수업을 하고, 나머지 1시간 동안 학생들이 조를 짜서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영어를 쥐뿔도 못 하는 나를 비롯한 나머지 한국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당시 천문학 수업을 같이 들었던 한국인들은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성적은 잘 나왔을지 모르지만, 토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감과 창의력의 중요성을 모른 채 두 달을 보냈다.


쓸데없이 10년도 더 된 미국 이야기를 꺼낸 건,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대상을 생각하기보다, 줄거리를 기억하고 시간 때우는 식으로 독서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된 것이다. 한동안 사진과 여행에 빠져 독서를 등한시한 나였지만, 최근 다시 문학을 읽으면서 느낀 생각을 공유하고 토의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개인들이 고립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생각을 자유롭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과 접촉을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 영역이 넓어졌다. 이런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책을 읽은 뒤 나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아 독서노트를 쓰기 시작하기로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만나다

<위대한 개츠비>는 책을 통해서든, 영화를 통해서든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미국 문학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최근에 읽은 것을 포함, 3번 정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은 것이 놀랍다. 나이가 들면서 '개츠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을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독서모임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선택된 이유는 분량이 적고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전문학임에도 영화를 통해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고, '개츠비=디카프리오'라는 공식을 대입하며 책을 읽으면 더욱 흥미진진해서였을까.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건 지겹지 않냐며 극구 반대했지만, 내가 제안한 <1984>에 투표한 건 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읽은 기억에서 '개츠비가 왜 위대한 거지? 그냥 개죽음당했을 뿐인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 것에 대한 반발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책 표지를 보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다.

"미국 현대 문학의 거대한 지평을 연 불멸의 걸작"

"그 어떤 미국 소설도 이 책이 성취한 문학적 예술성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그 어떤 책도 이 책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

미국의 거장들이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지만, 나에게 미국 문학은 러시아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에 비해 깊이가 없어 보였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기보다 '미국답게' 주체 못 하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들에 주목하는 미국 문학은 '미국 문학 답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국 문학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문학 중 하나다. 다만 나는 소설과 수필을 구분하는 것처럼 '미국 문학'을 '유럽 문학'과 다른 별개의 장르로 느꼈고, 책을 읽기 전에 가지는 부담감도 다른 국가의 문학을 읽을 때보다 덜했을 뿐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도 미국 문학답게 술술 읽혔으며, 인물의 내면보다 사건에 주목을 하고 읽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줄거리

개츠비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첫사랑인 데이지와 멀어지게 된다. 5년을 데이지와 떨어져 사는 동안, 데이지는 상류층인 톰 뷰캐넌과 결혼해서 딸아이도 갖게 되었다. 개츠비는 댄 코디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살다가, 코디가 죽은 뒤 마이어 울프심이라는 유대인과 사업을 해서 큰돈을 만지게 된다. 개츠비는 온갖 부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끌어모으는데, 1919년 월드시리즈 승부조작, 금주령을 위반한 주류 유통 등이 그 예다. 그는 막대한 돈을 모은 뒤, 사랑을 쫓아 롱아일랜드로 이사를 오게 된다. 데이지는 롱아일랜드의 이스트에그에 살고 있었고, 개츠비는 웨스트 에그에 호화로운 저택을 만들고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파티를 열었음에도 데이지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한 개츠비는 옆집의 닉 캘러웨이를 친구라 부르며 데이지와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데이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남편인 톰과 다툼을 벌이며 데이지에게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톰이 개츠비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 돈을 벌었다는 걸 폭로하자,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그를 멀리하게 된다. 개츠비와 톰이 한바탕 다툰 후 뉴욕에서 롱아일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톰의 정부(情夫)인 머틀을 치어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데이지의 마음은 이미 떠난 뒤였다. 톰은 머틀의 남편인 윌슨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윌슨이 개츠비를 죽인 뒤 자살함으로써 개츠비의 짧은 삶도 끝나게 된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책을 읽는 내내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개츠비는 환상 속에 빠져 사는 인물에 불과하다.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데이지를 잊지 못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건 인정하지만, 데이지도 자기를 잊지 않고 지냈을 거라는 망상을 하며 산 것이다.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 웨스트 에그로 이사 온 건 사랑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이지가 만약 개츠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스토커라고 생각하며 무서움에 떨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개츠비의 이러한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닉 캘러웨이와 마찬가지로 개츠비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허세와 사치, 온갖 거짓 속에서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과 비교하면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가 명확해진다. 데이지는 상류층에 속한 예쁜 여자였을 뿐이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자다. 이런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개츠비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 애를 썼다. 데이지와 만남이 성사된 후에는 그동안 이룩한 인간관계가 무의미하다는 듯이 성대하게 열던 파티를 중단시켰다.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닌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것이다. 데이지가 머틀을 치여 죽었을 때도 그는 데이지만 걱정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여나 남편인 톰에 의해 불상사를 당할까 싶어 그 집 주변을 맴도는 장면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데이지의 마음이 떠난 후에도 그녀의 전화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윌슨에 의해 죽을 때까지 그의 모든 신경은 데이지로 향해 있었다.

개츠비가 죽은 뒤 데이지를 포함한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 미국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겉으로는 금주령을 포함해 청교도적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멸할 수밖에 없는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뉴욕 사람들의 더러운 삶 속에서 개츠비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왔다. 비록 결과적으로 사랑을 이루지는 못 했지만 개츠비는 뉴욕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순수한 마음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데이지는 나쁜 여자에 불과한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데이지는 과연 나쁜 여자에 불과한 것일까. 소설가 김영하는 데이지를 '사랑을 사랑한 여자'라고 표현한다.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는 것을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캘러웨이가 차를 마시러 오라고 집으로 초대하자, 캘러웨이에게 "자기 나 사랑하는구나?"라고 묻는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는 점에서 데이지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임을 알 수 있다. 데이지는 개츠비와 재회했을 때도 개츠비 때문이 아니라 개츠비가 보여준 영국제 셔츠를 보며 기쁨에 겨워 운다. 개츠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변이 위협을 받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를 떠난다. 정말 한심하고 바보 같은 여자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를 순전히 악독한 여자로만 볼 수 없었다. 소설의 배경인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다. 여성들의 참정권이 허용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들이 쥐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으며, 상류층 여성들은 자신들을 평생 돌봐줄 남자를 잘 고르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데이지는 당시 상류층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동이 결코 옳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른 채 남자에게 모든 걸 기대는 습성은 미국 상류층 여성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계층이 확연히 분리된 사회에서 개츠비와 데이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데이지가 무지한 여자긴 하지만 삶의 확고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으며 교육의 기회가 제한적인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면 그녀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었다.


작가인 피츠제랄드의 삶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 (출처: www.npr.org)

피츠제럴드는 미국 중서부인 미네소타의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명문 대학교인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3학년 때 자퇴하고 만다. 22세가 되던 해, 앨라배마 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 세이어를 만나 약혼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파혼당했다. 하지만 고작 2년 뒤 <낙원의 이쪽>이라는 소설이 대성공을 거두자 젤다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젤다와 결혼한 후 미국 동부와 프랑스를 오가며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해 평생 빚을 떠안으며 살아간다. 피츠제랄드는 44세가 되던 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아내인 젤다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9년 뒤 세상을 떠난다.

피츠제랄드의 삶이 누군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개츠비는 작가인 피츠제랄드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인물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하고 상류층에 속한 여인을 사랑하는 삶이 소설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개츠비와 달리 피츠제랄드는 소설가로 성공을 거둔 뒤 젤다와 결혼하는 데까지 성공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개츠비를 '위대한' 인물로 그린 것은 젤다에 대한 고귀하고 순진한 사랑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피츠제랄드가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그의 고결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뉴욕에 가고 싶어 졌다

New York (출처: www.lonelyplanet.com)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소설 속의 뉴욕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피츠제랄드는 뉴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작가인 피츠제랄드는 뉴욕 시민들의 삶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왔다. 인생의 쓰라림을 맛보게 만든 도시였지만, 뉴욕에 대한 선망은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해 품었던 환상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도대체 뉴욕이 어떤 도시이길래 실패와 좌절을 안겨줬음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던 것일까. 뉴욕에 가고 싶어 졌다. 뉴욕에 가서 후회하더라도 피츠제럴드가 받은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졌다.


황금 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오, 내 사랑, 황금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내 사랑이여,
내가 당신을 차지하리라."

-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다음 독서노트 - 알베르 카뮈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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