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내가 <페스트>라는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서태지의 뮤지컬을 통해서였다. 뮤지컬이 열리는 LG아트센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와 한국 대중음악의 천재라 불리는 '서태지'가 만났다고 표현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페스트> 뮤지컬을 보기 위해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나는 국내여행에 빠져있던 촌뜨기였던 탓에 서울의 유명 공연장 순례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페스트>가 LG아트센터에서 열렸기 때문에 <페스트>를 뮤지컬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은 원작에 비해 깊이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뮤지컬은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10곡이 넘는 노래와 함께 소설의 내용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원작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원작을 변경하는 과정 도중에 소설 속 줄거리를 변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 뮤지컬의 숙명인데, 한국의 뮤지컬 제작자들은 각본을 짜면서 남녀 간의 사랑을 필수적으로 가미하곤 한다. 뮤지컬 <페스트>의 1부에서 등장인물들이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2부의 주요 내용은 소설과 달리 여성으로 바뀐 주인공 '타루'와 의사인 리외의 러브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게다가 원작과 달리 시대적 배경은 2087년으로 설정되었고, 인간 실존에 대한 고찰보다 시스템의 통제에 항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다 보니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뮤지컬을 관람하고 난 뒤 서태지의 작품이라는 것이 끌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긴 했지만 다른 뮤지컬에 비해 특출 난 점을 찾지는 못 했다.
기억에 잊혔던 <페스트>를 다시 만난 건 독서모임 때문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다른 소설을 지지했지만, 사사건건 남의 의견에 반대하는 내 성향 때문인지 책을 선택할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보로 나온 작품은 내가 제시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나는 뮤지컬과 원작이 같은 줄거리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페스트>가 재미없는 작품이며, 남성 작가의 소설 대신 여성 작가의 소설도 읽어봐야 되지 않겠냐고 열심히 설득했지만 투표 결과는 참담했다. <오만과 편견>은 1표, <페스트>는 7표를 얻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페스트>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되는 것 같다.)
별 기대 안 하고 <페스트>를 읽기 시작했지만, 이게 웬 걸,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특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너무 흥미진진했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진부한 신파극은 온데간데없고, '페스트'라는 재난 속에서 실존주의에 입각해 인간의 존재 가치를 찾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알베르 카뮈가 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지 깨달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등장인물 중 한 명에 나 자신을 투영하면서 읽게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만 파악해도 좋지만 알베르 카뮈가 주인공 타루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을 생각하며 읽으면 더 유익할 것 같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페스트>는 총 5부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다. 당시 프랑스의 도시였던 '오랑'에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도시에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하는지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인물들이 하나의 커다란 재앙에 대해 대처하는 과정을 보면서 알베르 카뮈가 지지했던 실존주의와 그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
1부는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는 과정과 오랑 시 당국의 허술했던 대처, 그리고 오랑 시 전체가 폐쇄되기까지의 흐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가 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배경이 같이 서술된다. 의사인 '리외'는 쥐가 떼거지로 죽고 사람들도 페스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죽어가자 당국의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한며 빠르게 대응한다. 도지사인 '리샤르'는 경과를 지켜보자며 전염병에 대해 공포하는 것을 주저하는 인물이다. '그랑'은 오랑시의 공무원으로 '잔'과 연인관계였으며, 저녁이 되면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쓴다. '코타르'는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공권력의 추적을 받자 자살을 시도한 인물로, 소동을 벌인 뒤 타루의 도움을 받는다. '랑베르'는 오랑에 업무차 온 파리 출신 신문기자로, 파리에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타루'는 사회 운동가 출신으로 '코타르'와 같은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
2부는 페스트가 도시 전역으로 퍼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서술한다. 돈과 술, 쾌락을 따르는 오랑 시민들이 페스트가 퍼져 나가면서 무기력해지고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리외'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페스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시가 폐쇄되자 랑베르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오랑을 빠져나가려는 온갖 시도를 한다. '파늘루'라는 신부는 오랑 시민들에게 페스트가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라고 역설하면서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는 강론을 펼친다. 페스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타루'는 자원 보건대를 조직한다. 타루는 주변 인물들에게 보건대에 가입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랑'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보건대에 참여하고, '랑베르'는 오랑을 떠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코타르'는 페스트 안에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하면서 구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밀매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데 여념이 없다.
3부는 페스트로 인해 이성을 잃은 오랑 시민들의 모습이 나온다. 초기에는 페스트에 담담했던 사람들도 가족들과 이웃들의 죽음이 눈 앞에 펼쳐지자 방화를 저질러 페스트를 태워 죽이려고 시도한 것이다. 몇몇 집단은 시를 탈출하기 위해 출입문을 공격해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자 장례식은 폐지되고 신속하게 시체를 치우는 조치가 취해졌다. 오랑 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페스트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되었고, 시민들은 점차 페스트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그들은 의지를 잃어버린 채 단지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존재로 변했다.
4부는 재앙이 계속되는 와중에 인물들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시점이다. '랑베르'는 '코타르'가 아는 밀거래꾼을 통해 파리로 떠날 수 있었으나, 자원 보건대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그런 와중에 '오통' 검사의 아들이 페스트에 걸리게 되고 의사인 '카르텔'이 만든 혈청이 아이를 대상으로 시험되었다. 신부인 '파늘루'는 어린아이가 죽는 와중에도 신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다가 페스트가 아닌 이유 모를 질병으로 사망한다. '타루'는 '리외'와 페스트 환자 수용소를 들린 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백한다. 그는 차장검사인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집을 떠났다. 타루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치고 죽이게 하는 페스트를 지니고 있는 환자이며, 자기는 그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고 말한다. 역사는 페스트 환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자기는 페스트 희생자의 편에 서서 살아가기로 다짐한 일에 대해 말하면서 타루의 가치관이 드러나게 된다. 페스트가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와중에 '그랑'마저 페스트에 걸리게 되는 암담한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오랑에 페스트로 사라진 쥐가 다시 나타나면서 사람들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생긴다.
5부는 페스트가 점차 쇠퇴하면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오랑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는 와중에도 '코타르'는 페스트가 사라지는 데에 대해 불만을 표한다. 오랑 시의 출입문이 열리기 시작할 때쯤, '타루'가 페스트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린다. 리외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타루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오랑 시는 페스트에서 해방되었고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뻐했지만, '코타르'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만행을 저지르고 경찰에 의해 진압된다. '코타르'의 만행이 끝나자 오랑 시 전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를 되찾게 된다.
<페스트>의 해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무 선량하고 그들의 대화 역시 너무 윤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인다.'라는 말이 나온다. <페스트>가 재미없다고 여긴 사람들은 소설의 주제의식이 너무 무겁고, 비현실적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페스트>의 이런 특성 때문에 알베르 카뮈가 꿈꾸던 이상향에 대해 알 수 있고,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타루가 리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하면서 한 말
타루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살다가, 사형 선고를 아무렇지 않게 내리는 그의 모습에 실망한 후 집을 떠난다. 사회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대해 실감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을 '페스트 환자'라고 표현한다.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전염되는 페스트의 특성과 유사하게, 개개인은 타인을 무의식 중에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타루는 불의에 당한 피해자의 편에 서서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타루가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방책인 것이다. 그는 페스트가 퍼질 때 보건대를 조직하여 사람들이 페스트를 무시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직접 맞닥뜨려야 할 문제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타루는 알베르 카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우리 사회에 산재하고 있는 위협과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인물이 바로 타로기 때문이다.
"사랑을 외면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의 관념, 어설픈 관념일 뿐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할 줄 모르게 된 거죠." -리외에게 오랑을 못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불평하면서 한 말
랑베르는 보건대에 참여하기 전에는 사랑을 쫓는 사람이었다. 단지 기자의 신분으로 오랑에 왔다가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의사인 리외가 이성에 따라 말하고 추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비판한다. 페스트로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사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이는 리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탈출하기 직전, 오랑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하지만 탈출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랑베르가 막상 탈출의 순간에 다가오자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다. 타루, 리외와 함께 보건대에서 일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 연대의식과 참여의 가치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현대인들이라면 타루나 리외보다 랑베르를 더 좋아할지 모른다. 랑베르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고 있으면서도,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탈출 직전에 극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랑은 공무원으로서 임무에 충실하면서 보건대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저녁 시간에 소설을 쓰는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한 문장을 완성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가 한심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랑은 비록 지성인은 아니었지만 연대의식을 가지고 함께 행동했기에 페스트를 격퇴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었다.
"페스트는 조심스럽고 참을성 있게, 마치 이 세상의 질서 자체인 것처럼 확고하게 그곳에 있습니다. 똑똑히 알아두십시오. 지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심지어 인간의 공허한 지식으로도 여러분은 페스트가 뻗치는 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페스트가 퍼진 뒤 강론을 펼치는 중
파늘루는 신부로서 신이 존재하며, 페스트는 신이 내리는 징벌이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페스트를 피하려고 발버둥 치더라도 이를 피할 방법은 없으며, 페스트에 의해 죽는 것을 달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통 검사의 아들이 죽는 와중에도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리는 벌이며 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견해를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가 병에 걸렸을 때도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며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며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페스트가 물러나자 리외한테 한 질문
코타르는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오랑시에 페스트가 퍼지며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페스트가 퍼지자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며 밀매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인다. '죄인'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계기가 바로 페스트인 것이다. 페스트가 물러날 때가 되자, 코타르는 페스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오히려 페스트가 다시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코타르는 페스트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운명은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다.
"세계의 질서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이상,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타루가 왜 환자들을 진료하는지 묻자 대답한 말
리외는 오랑 시에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자 시 당국에 빠른 조치를 요청하고, 페스트가 퍼진 뒤에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소설의 서술자이기도 한 리외는 타루처럼 공동체를 조직하기보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상류 엘리트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랑베르가 말한 것처럼, 아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와중에도 맡은 일에 집중하고 환자를 돌보는 리외가 냉혈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페스트>를 읽는 도중 가장 좋아하게 된 인물이 바로 리외다. 리외는 자신이 한 말처럼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웠다. 자신이 페스트에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끝까지 진료해주고, 환자가 죽으면 시체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했다. 환자의 가족들로부터 온갖 불평을 들어도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카뮈는 모든 사람이 페스트를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 타루를 높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나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고 애쓰는 리외가 오히려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나는 페스트를 통해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게 겪은 그 숨 막힐 듯한 상황과 우리가 살아낸 위협받고 유배당하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동시에 나는 이 해석을 존재 전반에 대한 개념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균을 퍼뜨릴 수 있는 전염병이다. 페스트는 인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사회 전체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다. 오랑 시 전체가 폐쇄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 바로 페스트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개개인의 노력이 아닌 공동체의 협력과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알베르 카뮈는 실존주의에 입각한 소설을 쓰면서, 인간의 존재 의의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서 찾고자 했다. 페스트 같은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선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 '페스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염병이 흔치 않은 현대 사회에서 페스트와 같이 사회 근간의 뿌리를 흔드는 사건을 발견하는 것이란 쉽지 않다. 질병보다는 오히려 시리아 내전∙이라크 전쟁∙한국전쟁과 같은 인간이 일으킨 어리석은 전쟁이 소설의 어지러운 상황을 일으킨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인으로서 나치 점령 하의 숨 막힐 듯한 분위기를 경험했다. 나치를 페스트에 대입해보면 코타르는 나치에 빌붙어 이득을 취한 매국노일 것이며, 타루는 나치에 끝까지 항거하다 죽은 애국자일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전쟁 같은 극한 환경이 아닌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들도 페스트로 여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타루가 자기가 살아왔던 삶을 회고하는 것에서 그 견해가 드러난다. 사형 선고를 내리는 아버지가 페스트를 전파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타루는 모든 개개인이 페스트 환자이며 페스트를 전염시키는 주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알베르 카뮈는 사형을 비롯한 모든 폭력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입장에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폭력을 페스트라 볼 수 있으며,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페스트 환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개개인 중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카뮈의 입장에서 보면 사형을 비롯한 몇몇 폭력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 또한 페스트 환자일 것이다.
카뮈는 사회에 만연한 페스트라는 질병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힘을 합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하고 그랑∙랑베르∙리외∙파늘루와 같이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모아 페스트를 퇴치하는데 노력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인간들도 사회의 문제에 대해 연대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리외는 타루의 행동을 절대 과장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보건대를 조직한 것이 페스트를 퇴치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페스트라는 문제에 직접 맞딱뜨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병폐들이 있지만, 시민들이 문제라고 인지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알베르 카뮈는 일상의 허위와 관례를 깨닫고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을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실존주의가 개인의 자유∙책임∙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우리 인간은 자유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바꾸려는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오랑은 알제리 북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인구는 150만 명 정도이며, 알제리 제2의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오랑을 평범한 도시이자 알제리 해안에 있는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보기 흉한 도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도 나온다. 오랑이 프랑스 도시로 묘사된 건,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 대부분의 프랑스 본토인들이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자기들의 영토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는데, 독립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과 살상이 무의미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알제리 주민들이 일으킨 독립 전쟁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건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생긴 폭력에 대해서 침묵한 것은 카뮈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는 예다. 카뮈는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이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연대의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어떤 형태의 감금 상태를 다른 형태로 표현해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해보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이다.
-대니얼 디포
다음 독서 노트 - 헤르만 헤세, <수래바퀴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