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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Oct 06. 2018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헤르만 헤세를 다시 만나며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은 건 무려 20여 년 전이었다. 풋풋한 중학생 1학년 시절, 수많은 추천목록 도서 중에서 <데미안>이라는 책이 제일 끌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나 <데미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느꼈던 감동에 심취해 몇 달을 행복한 상태로 보냈다. 운동장에 심긴 나무들이 노란색∙빨간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치 책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데미안>을 비롯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의 특징은 읽기 어렵지 않으며 독자들을 한동안 낭만에 빠뜨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중2병에 걸린 나조차 문학에 심취하게 만들었던 걸 보면 헤르만 헤세의 글은 독자의 내면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정말 오랜만에 헤르만 헤세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소설이다. 나이가 들고 점차 현실적으로 변해가자 소위 '성장 소설'이라고 말하는 헤세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사춘기 시절의 경험을 굳이 떠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현대 사회의 문제 또는 인간 내면에 대한 고찰 등 좀 더 수준 높아 보이는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의 소설은 미국 작가인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고 있었던 상황이라 고전 소설에서 굳이 헤세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게 된 계기는 역시나 독서모임에서 분량이 짧기 때문에 선택된 반 강제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 읽자마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헤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책의 두께와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에는 내가 실제로 경험하고 괴로워했던 삶의 한 조각이 담겨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줄거리

여행 중에 들고 다녀 상처입은 내 책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스 기벤라트'의 삶에 대해 서술하는 작품이다. 한스는 독일 남부 슈바벤 지방의 평범한 시민이었던 '요제프 기벤라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스는 어릴 적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시골 지방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길을 따른다. 재능 있는 소년들은 주(洲)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퇴빙겐 대학에 들어간 후 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다. 한스는 그리스어, 라틴어를 비롯한 어려운 과목들을 공부한 뒤 주 2등으로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다. 시험에 합격한 후 맞이한 방학 기간 동안 한스는 마음껏 놀지 못하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대수, 히브리어, 호메로스에 대해 예습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마울브론 수도원에서 학창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얻는다. 그러던 중 '헤르만 하일너'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며 그의 인생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일너는 시를 좋아하며 신학교의 고리타분한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거한다. 한스는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된 그를 멀리하라는 충고를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하일너는 학교가 내린 금지령을 여러 번 어기며 퇴학 조치를 당하게 되고 혼자 학교에 남겨진 한스는 외톨이가 된다. 그 뒤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 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한스는 신경쇠약에 걸려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스는 이후 아버지의 조언대로 기계공이 되기 위해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고 구두 수선공인 플라이크의 사촌 딸인 에마와 사랑에 빠진다. 한스가 에마와 만난 건 단 두 번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일이 끝날 때쯤이면 다시 그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다. 이후 한스는 친구인 아우구스트가 수습공을 끝내고 술집을 돌아다니는 파티에서 술에 진탕 취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물에 빠져 죽게 된다.


'한스 기벤라트'의 삶

소설의 결말을 접한 내가 느낀 감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비록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목가적인 풍경의 슈바벤 지방에서 평범한 기계공으로 살아갈 것 같았던 한스가 어린 나이에 익사체로 발견되는 건 예기치 못 한 전개였다. 한스는 현대사회에서 보면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에 불과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 한 채 죽은 청소년의 삶을 잊는 것은 더 쉽다. 헤세가 요절한 한스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스는 헤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헤세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신학교에서의 생활이 너무도 싫어 학교에서 나온 뒤 자살까지 시도한다. 한스는 처음엔 아버지와 목사, 교사의 뜻에 따라 체질에도 맞지 않는 라틴어, 히브리어, 대수 같은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교에 2등으로 입학하게 되지만 그의 이상은 친구인 하일너와 같이 문학에 빠지는 것이었다. 시를 읊는 하일너와 친하게 지낸다든지, 호메로스를 읽으며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든지 등 그의 문학적인 열정과 재능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한스는 학교를 떠날 때까지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로 귀환했다.


신학교의 교장은 한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한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열심히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교장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 선생, 정치인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인생에는 수많은 길이 있는데 정해진 길만 강요하는 사회는 100년 전 독일이나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다름이 없는 듯하다.


'한스'의 주변인들은 죄인인가?

하지만 나는 한스에게 신학자의 길을 강요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정해진 길을 강요받은 사람들에 불과했으며,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 고민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스의 부모였던 요제프는 한스처럼 공부를 잘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창 어린 나이의 아들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준다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엇나갈 확률도 높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스의 주변인들이 절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세계 내에서 한스가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한스와 같은 방을 썼던 루치우스가 음악에 재능이 없는 걸 알기에 바이올린 강의를 중단하는 음악 선생에게서도 그 모습이 나온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선택지에서 개인이 가장 알맞은 길을 선택하도록 도와준 것, 그들이 저지른 죄는 단지 그뿐이었다.


'헤르만 하일너'의 삶이 옳은 것인가?

신학교에서 퇴학 조치를 받고 시인의 길을 걸어간 하일너는 한스에게 인생에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인물이다. 하일너는 신학교에서의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일탈과 방황을 즐기며 시를 짓는데 몰두한다. 자신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선생들이 하일너를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된다. 한스는 하일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 같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귀환한 뒤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헤세는 한스와 하일너의 삶 모두 살아본 작가다. 신학교에 들어간 후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이후 자신이 원하던 문학에 평생 종사했기 때문이다. 헤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스의 삶이 비참했던 것을 보여준다. 마치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옳은 삶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문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아름답고 명확하게 글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으며 지금까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하일너는 시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에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었겠지만, 한스가 만약 하일너와 같은 길을 걸었다가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어땠을까. (물론 나는 한스가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작품 속 결말과 결국 비슷한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슈바벤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묘사된 슈바벤 지방은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정해진 길을 강요하는 독일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세계나 교육 현실은 비슷하구나'라는 걸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소도시에서 단 한 명만 공부시키는 것과 달리, 한국은 모든 학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어이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청소년들은 굳이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기술공, 서기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며 성장해 나가는데 반해, 공부에 털끝만큼도 재능이 없는 청소년들도 방과 후 학원에 다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 면에서 헤세가 비판하고자 했던 현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청소년들은 자신들만의 이상이 있으며, 이를 한 번쯤은 시도해 볼 권리는 있다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배경인 1870년 이후 무려 150년이 흐른 지금, 독일 청소년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독일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를 문학을 통해서 계속 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 읽었던 <데미안>을 다시 읽어봄으로써 그의 사상과 인생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졌다.


다음 독서 노트 - 다자이 오사무,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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