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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Oct 22. 2018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津軽∙惜別∙お伽草紙)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에 대해 연구한 다자이 오사무 (太宰 治)

쓰가루(津軽)를 만나다

내가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소설 때문이 아니라,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이라는 라이트 노벨 때문이었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은 고서에 얽힌 다양한 사건들을 비블리아 고서당의 주인인 시노카와 시오리코와 고서당에서 일하게 된 고우라 다이스케가 함께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다. 1권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에 등장하는 네 권의 작품 중 하나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초판본이었고, 이를 통해 그가 일본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 작가인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 중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고, 그의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먼저 읽게 되었다. 이후 일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다가 네부타 마츠리가 열리는 아오모리(青森)에 방문한 뒤 서점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뒤지다가 '쓰가루'라는 지명을 발견했다. '쓰가루'를 검색하니 아오모리 현에 위치한 쓰가루 반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다자이 오사무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다니!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책을 구입한 뒤, 틈이 날 때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야기에 대해 빠져들기 시작했다.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쓰가루>의 줄거리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를 따라가는 여행 코스도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쓰가루 반도의 가나기 출신이다. 그가 쓰가루 출신이긴 하지만 쓰가루 반도에 대해 아는 것은 적었다. 그도 그럴 듯이 다자이는 도쿄대학교 불문과 출신이며, 문학활동을 펼친 주무대 역시 도쿄였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근대 일본의 경제∙문화 중심지는 도쿄를 비롯한 간토(関東) 지방이었다. 소설가인 다자이가 도쿄를 제외한 지방, 심지어 고향이라고 해도 변두리에 불과한 쓰가루를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이 되자 그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봄에 쓰가루로 3주간의 취재 여행을 떠난 뒤, <쓰가루>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소설 속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판박이라 불러도 무관할 정도다. 서론에서 자신이 쓰가루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몇 군데 들린 것을 제외하곤 외지인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어릴 때는 이모가 사는 고쇼가와라에 종종 들렀고, 중학생이 되자 현청 소재지인 아오모리(青森)에서 공부를 했으며, 고등학교는 쓰가루 역사의 중심이었던 히로사키(弘前)에서 마쳤다. 어린 시절을 쓰가루에서 보냈지만 성인이 된 후 도쿄에서 외지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아는 쓰가루는 가나기, 고쇼가와라, 아오모리, 히로사키, 아사무시, 오와니에 불과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쓰가루를 돌아보면서 쓰가루 반도의 역사, 쓰가루 사람들의 특성과 문화, 각 지역의 자연환경과 산업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가 들린 지역은 소토가하마(外ヶ浜) 가니타(蟹田), 이마베쓰(今別) 민마야(三厩), 닷피(竜飛), 고쇼가와라(五所川原), 기즈쿠리(木造), 고도마리(小泊), 가나기(金木) 등이다. 혼슈 최북단 쓰가루 반도 곳곳을 3주 동안 여행하면서 각 지역의 특성과 명소에 대해 서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인들을 만나게 된 계기와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익살성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쓰가루>는 다자이 오사무가 어린 시절 자기를 돌봐준 보모인 다케를 만나러 고도마리에 가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병약했던 어머니 대신 자신을 세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 돌봐준 건 보모 다케였다. 굳이 여행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찾았던 것은 다케가 다자이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벚꽃이 휘날리는 봄 한가운데 운동회에서 그녀를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은 쓰가루의 분위기를 더욱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행기가 가치 있는 이유

다자이 오사무 생가

다자이 오사무는 <쓰가루>를 통해 일본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쓰가루 반도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 아오모리 현 일대는 오우라 다메노부가 시조인 쓰가루 번의 통치 하에 있었다. 오우라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의 편에 가담하여 제후로 등극, 히로사키를 중심으로 쓰가루 번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후 쓰가루 번은 12대 영주인 쓰쿠아키라가 중앙정부에 통치권을 반납하게 되었고, 이후 아오모리 현으로 재편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실 쓰가루가 위치한 아오모리 현은 네부타 마쓰리(ねぶた祭)를 제외하면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 크게 많지 않다. 아오모리 현의 중심 도시인 아오모리(青森), 쓰가루 역사의 중심이었던 히로사키(弘前), 일본의 100대 명산 중 하나라는 이와키산(岩木山)을 제외하면 다자이가 말하는 지명은 일본인에게조차 생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가루 반도가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먹을 것이 풍부한 낙원처럼 보이는 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에 대한 애착과 쓰가루 사람의 인정이 소설 곳곳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아오모리 네부타마츠리

난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여행 에세이를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내가 가 보지 못한 나라나 지역의 여행기는 가급적 안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행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추구하는 바는 개인에 따라 다른데, 직접 알지도 못하는 제3자의 입장을 들으며 간접체험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터인데,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여행지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주는 가이드북이 나에겐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는 여행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발감 없이 재미있게 읽혔다. 내가 소설 속에 등장한 아오모리와 히로사키를 방문한 것도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내가 몰랐던 쓰가루 반도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 또한 자세하게 설명해줬기 때문이었다. <쓰가루>를 잠시 덮고 도호쿠 지방을 여행할 때 참고한 책을 뒤적이니,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 중 아오모리와 히로사키를 제외하면 다자이가 언급한 마을은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현지인이 아니면 알지도 못한 한적한 농어촌 마을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각 지방에 얽힌 내력과 특색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쓰가루>를 집필하면서 그렸던 그림

게다가 다자이 오사무의 여행기는 쓰가루 지방의 명소가 아닌 사람을 찾기 위한 여행기다. <쓰가루>는 다자이답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한 과정임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진부함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 팬들이 <쓰가루>에 등장한 마을을 순례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가 여행하는 동안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쓰가루 사람들, 특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케와 재회하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따스함을 느끼고 쓰가루 사람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역사나 문화와 같은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했던 소중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함인 것이다.


나도 내 고향 '창원'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나갈 수 있을까.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인 '가나기'처럼 여행책에 등장하지 않는, 아니 등장할 수도 없는 공업도시 창원에 대해서 <쓰가루>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만약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제목은 뭘로 해야 할까. 관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공장으로 뒤덮여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창원의 공장들 사이에 낀 마산만을 아름답게 묘사할 자신이 없는 데다 창원에는 히로사키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도 없다. 무엇보다 다자이 오사무가 가진 필력을 일개 개발자인 내가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다케'같이 내 어린 시절의 은사가 창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석별>의 줄거리

루쉰이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의 기숙사

<석별>은 루쉰의 학창 시절이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노의사인 '다나카'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수기 형식의 소설이다. 루쉰은 실제로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의 은사였던 후지노 선생님에 대한 수필을 썼으며, 비록 적국의 선생이었지만 선생님의 격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석별>을 통해 루쉰의 학창 시절을 친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나(다나카)'는 가업을 잇기 위해 도호쿠 지방의 대도시인 1904년에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의 신입생은 150명 정도로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 온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어울리고 있었다. 도호쿠의 촌뜨기 출신이었던 '나'는 사투리가 강해 이들과 어울릴 생각을 하지 못 하고 외톨이로 지내며 센다이 시내를 둘러보며 무단결석을 일삼는다. 그가 '루쉰'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일본 제일의 절경이라는 마쓰시마 (松島)를 유람할 때였다. 사투리 억양이 묻어 나오는 '루쉰'이 같은 지방 출신인 줄 알았지만 그는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었다.


마쓰시마 유람을 계기로 저우 씨 (루쉰)과 가까워진 '나'는 저우 씨가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알게 된다. 저우 씨는 병에 걸린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통해 중국인들의 무지에 대해 깨닫게 되고, 의학을 전공하여 미신에 의지해 치료받는 중국 의료 체계를 혁신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 오게 된다. 저우 씨가 처음부터 센다이에서 학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그가 처음 도달한 곳은 도쿄였지만, 같이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이 타청흥한(淸興漢)을 외치며 학업을 등한시하자 도쿄와 떨어진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저우 씨가 중국인임에도 의학 공부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후시노 선생님이었다. 후시노는 해부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루쉰의 해부학 노트를 첨삭해주며 그가 중국에서 훌륭한 의사로 활동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루쉰은 점점 더 의학보다 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환등기 사건'을 통해 중국의 국민성부터 바꿔야 한다는 결심을 확고히 한다. 이후 저우 씨가 떠나기 4일 전 후지노 선생님은 저우 씨에게 뒷면에 '석별(惜別)'이라고 적힌 사진을 한 장 건네주며,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루쉰에 대한 이해

중국의 대문호, 루쉰

루쉰은 1881년 중국의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저우(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루쉰은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지은 필명이다. 그가 일본에 간 건 1902년으로, 청나라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별되어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로 입학했다. '환등기 사건'을 계기로 문학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도쿄로 돌아가 중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집필, 번역 활동에 힘쓴다. 1909년에 고국으로 귀국했으며, 1912년에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따라 베이징에 거주하며 교육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루쉰은 귀국 이후 중국의 현실을 보고 유학시절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점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문학활동을 멀리하고 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당시에 느꼈던 허무함과 자조감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조언으로 문학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18년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아Q정전>, <방황>, <들풀>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루쉰은 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가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중국의 현실을 깨닫고 민중들을 깨우치려는 계몽주의 문학의 선구자였으며, 본인이 다양한 투쟁을 통해 중국을 더 나은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환등기 사건'의 배경이 된 중국 스파이 처형 장면


<석별>의 의미

루쉰의 동상이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세워져 있다

이별(離別)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한다. 배별(拜別)은 존경하는 사람과의 작별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봉별(奉別)은 윗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말한다. 작별(作別)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을 뜻한다. 고별(告別)은 이별을 알리는 것이다. 결별(訣別)은 기약 없는 이별을 말하며, 관계나 교제를 영원히 끊는 것이니 완전히 절교하는 행위다. 하지만 석별(惜別)은 무미건조한 이 단어들과 다르다. '석별'은 감정이 드러난 말로서 서로 애틋하게 이별하는 것을 뜻한다.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의 후시노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인 저우 씨가 중국을 개혁시키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저우 씨는 비록 기대를 저버리고 의학을 그만두게 되지만, 후시노 선생님은 결코 실망하지 않고 그가 품은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기원해주며 이별의 순간에 '석별(惜別)'이라고 적힌 사진을 건넨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에 대한 야욕을 품고 침략을 가속화하는 시점이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컸을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서로를 대했다. 후시노 선생님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저우 씨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가 잘 되기를 기원한 것이다.


나는 일본 여행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이다. 일본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몇 시간 동안 말할 자신도 있다. 일본 도시의 깔끔함,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본의 절과 신사, 장인 정신을 가지고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요리사들이 내주는 요리 등 서양인들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가장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친절함에 있다. 지금은 구글 맵을 사용하기 때문에 길을 물어볼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일이 과반사였고 그때마다 일본인들은 말이 안 통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시코쿠를 여행할 때는 작은 역장의 아주머니가 내 부족한 일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야시마지(屋島寺)를 둘러보는 동안 짐을 맡아주고 가는 길을 안내해주셨다. 한국에서는? '도를 아십니까?'를 물어보는 사람으로 오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갑자기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편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에 우리 민족에 큰 과오를 저지른 것과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일본 정부와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며, 이들에 대한 비판은 명백히 타당하다. 하지만 일본인이라고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언제나 친절했으며 격의 없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더 다가가기 쉬운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찾고 싶은 나라'라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각인이 되었다.


후지노 선생님과 루쉰은 청일전쟁 이후에 만났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후지노 선생님이 자기 시간을 떼내어 루쉰을 도와준 것은, 그에게서 중국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았고 그가 꿈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항상 개인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라고 싸잡아 욕하는 태도는 모순적이며 우리가 버려야 할 자세다. 자신이 잘난 것도 아닌데 중국인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중화사상과 다를 것이 뭔가. 루쉰이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중국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이러한 무지를 깨닫고 중국인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국가, 출신,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후지노 선생님처럼 개인이 품고 있는 내면을 바라보고 유대감을 느끼고 이별에 대해 '석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국적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루쉰은 그의 전집을 출간할 때 어떤 작품을 넣으면 좋을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택해도 좋다. 그러나 <후지노 선생님>만은 꼭 그 선집에 넣어주기 바란다."


<옛날이야기>의 줄거리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토끼와 너구리

<옛날이야기>는 혹부리 영감, 우라시마, 부싯돌 산, 혀 잘린 참새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에서 전해져 오는 옛날이야기들을 패러디하여 글을 쓴 뒤 하나로 묶은 것이다. <옛날이야기>는 작품의 내용보다 다자이 오사무가 방공호에 있는 동안에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들을 만나 혹을 떼는 데 성공한 영감과 자신도 혹을 떼러 갔다가 오히려 혹을 붙여서 오는 이웃집 영감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웃집 영감의 모습의 과욕 때문이 아니라 괴상한 춤을 춰서 도깨비들이 놀라게 하였기 때문에 혹이 두 개 생겼다고 패러디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혹부리 영감'에서 악인은 아무도 없으나 이웃집 영감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 삶의 밑바닥에는 늘 이런 문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라시마'는 교토 북부 해안가에 살던 우라시마라는 사람이 바다거북을 따라 용궁을 여행한 이야기다. 바다거북의 안내에 따라 용궁에 간 그는 용녀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작별 선물로 조개껍데기를 얻고 뭍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가 용궁에서 보낸 찰나의 시간은 뭍에서의 300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고, 그가 조개껍데기를 열자 세월의 영향을 받아 백발의 노인으로 변하게 된다. 우라시마가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이와 같은 일을 겪은 것에 대해 다자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부싯돌 산'은 한 노부부에게 잡혀 죽을 뻔한 처지에 처한 너구리가 궁여지책으로 할머니를 속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으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할머니는 할머니 탕이 되어버렸고, 토끼가 갖가지 속임수를 써서 너구리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토끼는 부싯돌 산이라고 속이고 너구리 등에 있는 땔감을 태워 너구리에게 화상을 입히고, 약 장수로 변장한 뒤 화상을 입은 너구리 등에 고약 대신 수상한 물체를 바르고, 진흙으로 만든 배에 너구리를 태워 익사시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너구리는 특별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토끼를 좋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너구리는 나이 든 중년 남자, 토끼는 꽃다운 나이의 아름다운 처녀를 상징하는데, 다자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여성에게는 모두 무자비한 토끼가 한 마리 살고 있고 남성에게는 저 선량한 너구리가 늘 익사 직전 상태로 발버둥 치고 있다."


'혀 잘린 참새'는 센다이 지방에 사는 30대 남자와 그 아내, 그리고 참새에 얽힌 이야기다. 30대 남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자로 '할아버지'라 불리며 하인 출신인 아내의 보살핌 속에 살아간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집에 찾아온 참새와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의 시샘에 의해 참새의 혀가 뽑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할아버지는 대숲에 들어가 혀 잘린 참새를 찾기 시작했고, 참새 마을에서 마침내 '오테루'라 불리는 그의 벗을 찾아낸다. 다시 만난 오테루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 후 참새의 비녀를 얻고 돌아오자, 아내는 다시 할아버지를 추궁해 참새 마을로 찾아간다. 하지만 아내는 금화가 가득 든 궤짝을 지고 눈 위에 엎드린 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할아버지는 금화 덕택인지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일생을 마친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

다자이 오사무 70주년

다자이 오사무의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로, 1909년 아오모리현 기타쓰가루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유하게 자랐지만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가문에 환멸을 느끼고 죄의식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다. 도쿄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했지만 좌익 활동 등으로 중퇴를 한 뒤, 193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에 발표한 소설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하고, 1936년에 소설집 <만년>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부인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등 방황을 거듭하다가, 1939년 미치코라는 여성과 결혼한 뒤 도쿄에 이주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다자이는 태평양 전쟁 와중에도 시국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는 대신,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와 같은 당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일본의 패전 이후 문학계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을 찬양하고 이에 동조하는 유행이 주를 이루자, 그는 자신을 '무뢰파 작가'로 칭하며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다자이는 최후의 걸작인 <인간실격>을 집필한 뒤, 1948년 6월 13일에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강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생전 모습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가 다자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전쟁이 한창 중인 시기에서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와중에 다자이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보모였던 다케와 재회한 이야기, 루쉰과 호시노 선생님의 애틋한 이별, 방공호에 지내면서 딸에게 들려준 옛날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사람 사이에 느끼는 유대감에서 찾으려고 했다. 사람을 사랑했고 거기에서 애착을 느낀 그가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을 택한 건 변해가는 세태에서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말년에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치면서 일본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던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져서 죽는 것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은 것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변해가는 일본 사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그는 <쓰가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는 또 다른 전문 과목이 있다. 속인들은 그 과목을 사랑이라 부른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연구하는 과목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주로 이 한 과목을 추구했다."


다음 독서 노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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